[프라임경제] 최근 건설업계는 어느 때보다 힘든 보릿고개를 지나고 있다. 국내 건설사들은 급변하는 시대 흐름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건설사記를 통해 국내외 건설을 주도하고 있는 건설 관련 업계 이야기를 논하고자 한다. 이번 회차는 건설은 물론 사업 다각화를 통해 풍부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는 태영건설 태동과 역사에 대해 살펴본다.
1973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태영건설은 현재 건설은 물론 △미디어 △환경 △레저 △기타사업 5개의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건설회사로서의 안정적인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건설업 한계를 넘어서 '사업 다각화'를 이뤄내고 있는 중견건설사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창업 당시에는 신생 업체인 탓에 넉넉지 않은 회사 자금 여력은 물론, 실적이 전무해 공사 수주조차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안정 속의 성장'이라는 경영 철학 아래 소규모 관급공사 사업부터 착실히 내실을 닦으면서 점차 업계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7년 수주한 선유수원지 공사 수주를 계기로 '상수도 공사 전문업체'로 떠오른 태영건설은 건축 분야 사업 영역을 대폭 확대, 영세성을 면치 못하던 건설업체에서 중견건설사로의 성장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1989년 도급순위 36위를 기록, 기업공개까지 단행하면서 명실상부 국내 대표 건설업체로의 도약에 성공했다.
이런 태영건설의 뿌리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자 윤세영 회장(1933년생)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출신으로 2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윤 회장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길 좋아했으며, 늘 친구들을 이끄는 대장 노릇을 하곤 했다.
해방 직후(1946년) 윤 회장 가정은 부친 윤현구씨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겠다'라는 결심 하에 고향을 떠나 경기 양평군 지제면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 부산으로의 피난은 불가피했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 부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쟁이 끝난 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작은 외삼촌이 거주하고 있는 서울로 상경했다.
작은 외삼촌 임봉순씨는 와세다대학을 졸업, 이후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거쳐 대한통운 사장까지 지낸 자수성가 대표 인물이다. 이는 윤 회장에게 있어 큰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늘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그를 닮기 위해 학업을 이어나가기 위한 결심을 굳혔다.
실제 서울고에 입학한 윤 회장은 공부와 가정교사 일을 병행하면서 학비를 마련,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讀夜耕)'으로 힘든 나날을 버텨냈다. 그의 향학열(向學熱)은 누구도 막지 못했다.
"서울고에 입학한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다. 전국 준재들과 함께 공부하며 꿈을 키운 것은 '일생일대' 기회였기 때문이다. 당시 은사를 통해 정신적 기초를 닦을 수 있었으며,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지키자'라는 교훈은 인생 좌우명이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울대 법학과'에 입성한 윤 회장은 군대 장교로 정식 임관했다. 장교 복무시 호구지책 해결은 물론 학업도 병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군 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대학을 졸업(1961년)한 그는 '5.16 군사 정변' 이후 국방부 장관 전속부관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김종오 육군참모총장실 의전담당 장교로 전속된 것이다.
"군 장교 시절은 사회생활에 대해 많은 것을 터득한 시기였다. 무엇보다 지도층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사업 성장'에 있어 굳건한 발판이 됐다."
이후 군 생활을 마무리(1963년 중위 전역)한 윤 회장은 이동녕 국회의원의 선택을 받아 비서관으로 천거됐다. 당시 경험한 비서관 업무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가전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시각을 형성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윤 회장이 건설업계에 본격 발을 내디딘 것은 이 의원이 정계를 은퇴하면서다. 삼주개발 상무이사(1년)와 미륭건설 상무이사(3년)를 거치면서 기업 경영에 대한 지식과 자신감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정부가 건설업 면허 접수를 공고(1973년 9월)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를 기회라고 판단한 윤 회장이 창업 준비에 본격 돌입한 것이다. 물론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탓에 10년간 모은 금액과 아내가 지닌 쌈짓돈까지 끌어 모아 근근히 자금을 마련했다.
갖은 노력 끝에 마침내 서울 마포 대성극장 내 작은 사무실에 한 회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본금 300만원의 태영건설 전신 '태영개발'이 공식 출범하게 된 순간이다.
"사훈은 '지성, 창조, 인화'로 인생관과 경영철학 등을 대변하고 있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자세,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기업 정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인간존중 정신이야말로 자수성가를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신생업체인 탓에 회사 운영 자금 부족으로 동분서주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또 실적조차 없어 공사 수주에 있어 입찰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윤 회장은 이를 거름 삼아 차분히 성장을 이뤄나갔다. '회사 성장을 위해 절대 무리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토대로 크게 관심 받지 못했던 소규모 관급공사 및 정부 주관 문화재 복원 공사 수주에 집중하면서 실적을 쌓아나간 것이다. 노력이 통했던 탓일까. 발주처로부터 공신력을 얻기 시작한 동시에, 자연스레 대규모 공사도 수주하기에 이르렀다.
창업 4년만에 수주한 선유수원지 공사는 태영건설 발전에 있어 중요 요소로 꼽히고 있다. ⓒ 태영건설
특히 1977년 수주한 선유수원지 공사는 태영개발이 탄탄한 성장 기반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선사했다. 해당 공사는 당시 서울시 관심 사업 중 하나로, 상당한 토목기술과 플랜트 설비기술이 복합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기술 집약적 프로젝트였다.
일각에서는 창립 4년밖에 되지 않는 신생 건설회사가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했다는 점에서 시공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윤 회장은 보란 듯이 사업을 성공(1980년 준공)시키면서 우려를 단숨에 불식시켰다.
이를 통해 태영개발은 그간 '문화재 복원 공사나 맡는 작은 건설회사'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상수도 공사 전문업체로 명성을 떨쳤다. 아울러 영세성을 면치 못하던 건설업체에서 중견건설사로의 도약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토목 기술과 플랜트 설비 기술을 복합적으로 운용하는 높은 건설 기술력을 확보한 업체로 올라섰다. 선유수원지 공사는 이후 태영개발이 상수도는 물론 하수 처리 설비 분야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이후 가락 토지 구획정리 사업(1983년)까지 수주, 대형 건설업체들과 당당히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위치까지 성장했다."
윤 회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부의 대규모 주택 공급을 통한 공급 확대 정책 아래 1981년 '건설부 주택건설 지정업체 등록'을 감행하면서 건축 분야 사업 영역을 대폭 확대해 나갔다.
1980년대 태영개발이 완공한 대표적인 건축 공사는 △우상빌딩 신축공사 △여주군 청사 △의정부 시민회관 △과천시 청사 신축공사 △의정부시 청사 신축공사 △양산군 청사 △추계예술학교 미술관 △포천 군청사 등이다.
여기에 의정부 금오동 아파트 건설 공사 6공구(1981년 3월)를 맡아 아파트 시공 분야에도 처음 진출했다. 비록 소규모 단지였지만, 아파트 시장에 첫 발을 내디뎠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1983년 9월12일 착공해 1985년 7월25일 준공된 태영 여의도 사옥 전경. ⓒ 태영건설
이처럼 회사 외형 성장은 물론 경영 안정화까지 이뤄낸 윤 회장은 1985년 여의도에 사옥을 설립, 본사를 이전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사명도 '태영'으로 전격 변경하면서 굳건한 경영 체제를 확립했다.
파죽지세로 성장을 거듭한 태영은 1987년 도급순위 45위를 기록, 1군 건설사 반열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뤄냈으며, 1989년에는 도급 한도액 426억3943만원으로 단숨에 36위로 뛰어올랐다. 이에 힘입어 기업공개(1989년)까지 단행, 명실상부 건실한 중견건설사로 거듭났다.
태영건설 관계자는 "힘든 시기를 겪어내고 이뤄낸 이런 성장으로 인해 향후 미디어, 환경, 레저, 기타사업까지 아우르는 종합건설업체로 발전했다"라며 "윤 회장 특유의 경영 철학은 현재까지도 태영 발전에 있어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