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일본 정부는 2019년 7월 대(對)한국 수출규제 강화 조치를 발표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소재 3종(플루오린 폴리이미드·포토레지스트·불화수소)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한데 이어 백색국가(수출절차 우대국) 명단인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일본의 이 같은 조치에 한국 정부와 국내 기업들은 신규 공급원 발굴 및 국산화 필요성에 공감하며 '소재·부품·장비(이하 소부장)' 경쟁력 강화 대책을 시행해 나갔다. 그 결과 핵심 품목 공급망 안정화 및 사업화 진행 등 유의미한 성과들이 도출됐다.
산업통장자원부가 지난 24일 '소부장 기업현장 보고서'를 통해 일본 수출규제 3대 품목의 국산화가 빠르게 확충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 프라임경제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업부)는 지난 24일 '소부장 기업현장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수출규제 3대 품목은 국내 생산을 빠르게 확충하고 수급 여건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중이다.
특히 수입처를 유럽연합(EU)과 미국 등으로 다변화하고, 품목별 평균 재고 수준이 기존 대비 2배 이상 확충된 것으로 집계됐다. 뿐만 아니라 소부장 관련 23개 품목의 시제품이 개발되고, 434건의 특허가 출원되는 등 소부장 국산화가 본격화됐다.
다만, 우리나라 전체 소재·부품 수입액 가운데 일본 제품의 비중은 16.0%로 전년 대비 0.2% 소폭 상승했고, 대일 무역적자 역시 2019년 141억5000만달러에서 지난해 153억7000만달러로 8.6% 늘었다는 점 등으로 인해 대일 수입 의존도를 감소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의 비해 개선세가 더딘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의 소부장 국산화 움직임에 따른 수치상 변화 외 실질적 변화가 포착됐다. 일본 정부가 규정한 수출규제 대상 품목은 아니지만,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이 국내에 생산설비를 짓기 위한 직접 투자에 나선 것이다.
충청남도는 19일 일본 고순도 반도체 제조용 가스 생산 기업 다이킨공업과 420억원 규모 투자협약(MOU)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번 협약에 따라 다이킨공업은 국내 씨앤지하이테크사와 합작해 법인을 신설, 당진 송산2 소재 외국인 투자지역 3만4070㎡(약 1만306평) 부지에 반도체 제조용 가스 생산 공장을 신축한다.
다이킨공업이 국내 씨앤지하이테크사와 합작해 법인을 신설, 당진시에 반도체 제조용 가스 생산 공장을 신축한다. ⓒ 충청남도
다이킨공업은 신축 공장을 통해 반도체 제조용 가스를 생산·판매할 예정이며, 오는 2022년 10월부터 에어컨용 냉매 가스의 순도를 높여 반도체 제조에 적합한 고순도 가스를 생산할 계획이다. 이 곳에서 생산된 가스는 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제조사에 납품될 예정이다.
특히 다이킨공업은 앞으로 5년간 약 420억원(외국인 투자금액 약 281억원)을 투자하고, 50명을 신규 고용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충남도와 당진시는 △전기 △가스 △용수 △하수·배수처리 등 인프라 설비 부문에 대해 협력하고 사업 인허가 취득 및 공장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해소토록 지원한다.
◆다이킨공업(DAIKIN INDUSTRIES, ltd.)
주목할 점은 다이킨공업이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지정한 전범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이명수 의원(자유한국당)이 발표한 '일본 전범기업 3차 명단'에도 기재된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라는 점이다.
다이킨공업 사사에 따르면, 자사는 1924년 창립자인 야마다 아키라(山田晁)가 비행기용 라디에이터 튜브 생산을 목적으로 오사카 시에 '오사카 금속 공업소'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됐다.
이곳은 오사카(大阪)의 '大'와 금속공업(金属工業)의 '金'을 합쳐 다이킨(大金)이라는 약어로 불렸고, 1963년 정식 사명으로 채택돼 지금의 다이킨공업으로 불리게 됐다.
다이킨공업은 1930년대 불소계 냉매와 프레온 냉매 연구에 착수해 1936년 전철용 냉방 유닛을 제조, 일본 최초의 냉방 기차를 탄생시켰다. 이후 일본 해군 잠수함용 '미후지레타'라는 이름의 냉동기(주위 온도보다 낮추는 장치) 제조에 착수, 1938년 해군에 납품했다.
특히 다이킨공업이 납품한 이 냉동기는 1941년부터 발발된 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인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 잠수함이 남태평양 장기 작전 행동을 가능케 한 일등공신 중 하나로 꼽힌다.
다이킨공업은 일본의 2차 세계 대전 거점이 된 오사카 항만에서 축적해온 기술력을 기반으로 생산공장들을 군수공장으로 본격 탈바꿈했고, 군수물품을 생산 및 납품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조선인이 강제동원 됐다는 데 있다.
실제로 이명수 의원(자유한국당)이 지난 2012년 8월29일 발표한 '일본 전범기업 3차 명단'에 따르면, 다이킨공업은 일본 내 강제동원작업장 1곳을 운영했다.
이명수 의원이 발표한 일본 전범기업 3차 명단. ⓒ 이명수 의원실
다이킨공업이 운영한 강제동원작업장 관련된 구체적인 연구자료는 더 존재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9년 발행한 '일제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 학술연구용역 보고서-오사카 지역 군수공장의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책임연구원 유지아)'에는 다이킨공업을 비롯한 오사카 항만에 위치한 군수공장 내 실태들이 기재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오사카 항만을 따라 설립된 군수공장에는 1942년 6월 이후 많은 조선인이 강제로 동원됐다. 특히 1943년 이후에는 공장으로의 강제 동원이 더욱 진행됐고, 총 9곳 △고노하나구의 스미토모금속공업 △히타치조선소 사쿠라지마 △다이쇼구의 구보타철강 소오카지마 공장 △일본제철 오사카공장 △협화조선소 △제국화공 오사카공장 △스미노가와구의 후지나가타조선소 △히라노의 오사카금속공업(현 다이킨공업) 등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이 이뤄졌다.
◆비극과 희극 사이 그 언저리에 위치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군수물품을 만들어 전쟁범죄를 자행하는데 일조한 다이킨공업은 현재 산업용 공조사업 분야 세계 최고 점유율을 보유했으며, 동분야에서 지난해 매출액만 약 25조원으로 전 세계 1위 매출을 자랑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특히 냉매 개발에서부터 에어컨을 비롯한 공조기기 개발까지 종합 사업을 영위하는 세계 유일의 공조 종합 회사라는 점에서 지속 성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불소 화학을 다룬 선도 업체답게 불소 화합물을 기반으로, 공조기기에 사용되는 냉매가스 및 반도체용 특수가스 등 다양한 용도의 상품을 개발해 화학기업으로서도 그 영역을 점차 확대해 나가고 있다.
유명 희극인 찰리 채플린이 했던 유명한 말 중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다이킨공업이 일본 수출규제로 인해 자국 내 만연해진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거액을 들여 한국에 직접 공장을 설립한다는 소식 자체는 멀리서 보면 '희극'에 가깝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과거 전범기업으로서 조선인 강제동원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기반으로 성장한 회사임에도 배상에 대한 언급과 사과 한 마디 없이 지자체의 도움을 받으며, 국내 기업에 원활한 소재 납품 목적으로 공장을 설립한다는 것은 사실 '비극'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