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바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에 있는 '청계고가도로 존치교각(동대문구 용두동)' 사진. 청계천 복원사업이 이뤄지면서, 개발시대를 기억하기 위해 존치됐다. = 장귀용 기자.
[인사이드컷] 광화문에서 시작해, 한양대학교 앞 살곶이체육공원까지 이어지는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 찍은 사진입니다. 청계천의 바우당교(성동구 상왕십리동)와 무학교(동대문구 용두동) 사이에 있는 '청계고가도로 존치교각'인데요.
2003년 시작돼, 2005년 10월 완료된 청계천 복원사업 당시, 개발시대를 기억하는 의미로 청계고가도로 철거 당시 3개 교각을 남겨두었다고 하네요.
기억을 위해 남겨진 교각들이고 '서울시미래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한 '상징물'이지만, 10여년이 더 흐른 현재는 그 연원을 알지 못해, 청계천 길가에 설명문을 보지 못한 시민들에게 '흉물'로 오인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는데, 조선시대 태종대왕 때 만들어진 인공하천이었다고 합니다. 1411년 12월, 개천을 만들기 위한 '개거도감(開渠都監, 이후 개천도감으로 변경)'을 설치하고 단 1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전해집니다.
한양(서울의 옛 지명)을 둘러싼 4대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한강으로 바로 빠지지 못하고 저지대의 도심으로 흘러와 홍수가 일어나는 일이 잦자 만들게 됐다는데요. 충청·전라·경상도에서 5만2800여명이 동원됐다고 합니다.
이후 하수가 흐르면서 쌓인 오물로 기능이 떨어지자, 영조대왕 때에 다시 57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 21만5000여명을 동원해 의 백성이 동원해 준천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지명정리 사업으로 지금의 이름인 '청계천(靑溪川)'이 되었고, 1958년부터 1977년까지 복개공사를 해, 땅에 묻히게 되고, 위에 고가도로가 설치되어 '청계고가도로'가 된 것이죠. 당시 인근에 31층 건물인 삼일빌딩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는데, 이 이름을 따 '삼일고가도로'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복원사업이후 청계천은 시민들에겐 문화의 공간이자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됐고, 당시 복원사업을 추진한 이명박 시장(전 대통령)의 가장 인정받는 치적으로 '청계천 복원 사업'이 지금까지도 꼽히고 있습니다.
문득 든 생각입니다. 참으로 많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수없이 변천해온 청계천을 '복원'한다는 것은 어느 시점으로의 '복원'이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청계천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지류들을 복원한 게 아니라 콘크리트를 붇고 한강 수돗물을 계속해서 흘려보내는 구조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이런 생각은 더욱 깊어집니다.
물론 태생이 '인공하천'인 '청계천'이기에, 콘크리트로 강바닥을 깔았다고 해서, 실패한 복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하는 '청계천'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기억'과 그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기록' 그리고 '기록'을 빛나게 하는 '보존'이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요즘은 단순히 지역이나 주택을 철거하고 건물을 올리는 재건축·재개발보다, 공간의 특색을 살리는 '도시재생사업'이 적극 추진되고 있습니다.
공간의 특색을 살리는 '도시재생사업'도 그 공간에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저마다 생각이 다른 경우도 많이 생기기도 합니다.
혹자는 "옛 상가나 건물이 흉물스러우니 최첨단 건물에 입주를 시키자"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해당 산업의 특성상 고유 공간을 보전하자"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시재생사업'은 일반 재건축·재개발보다 더욱 복잡하고, 추진이 더딥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철저하고 심도 있는 논의와 방식선정을 통해, '질적 차이'를 가진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