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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 <6> - 관동대지진 세계대공황으로 끝없이 침체

증시부양책 실시 대규모 감자 불구 경취 10년 침체 지속

임경오 기자 | iko@newsprime.co.kr | 2005.11.05 10:32:43

   
 
      1921년 경취주 파동 후 주가 그래프. 1925~1926년 반짝 반등한 것을 빼곤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있다.
 

한국 증시 최초 증권주 파동 책임으로 한국인 중역 세사람중 하나이며 조선일보 초대 부사장이었던 예종석(芮宗錫)이 물러났으며 1924년엔 조진태 취체역(이사의 일본식 직책)마저 경취를 떠났다.

조진태는 조선상업은행장으로 당시 소문난 부자였다.

이에 따라 3.1운동직후 일제의 문화정책에 따라 조선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 발행 허가를 받은 대정실업친목회 간사 예종석이 스스로 부사장에 취임하고 조진태를 초대 사장으로 추대, 1920년 3월5일 서울 관철동 249번지에서 타블로이드 배대판 4면의 6일자 석간 조선일보 첫호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조선일보 초대사장이자 경취 취체역 조진태와 조선일보 부사장이자 경취 중역이었던 예종석이 조선일보 임원에서 경질됐다는 당시 신문기사.
 
조진태와 예종석은 5개월간 재임한 뒤 차례로 조선일보를 떠났으며 이 인연으로 인해 경취 설립시 한국인 중역 3명중 2명의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조진태는 1927년 2월21일 종로 자택에 한 소년이 방화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었으나 조사결과 일개 소년범에 불과했다는 기사가 매일신보에 실릴 정도로 유명인물이자 대표적 친일파였다. 

아무튼 조선최초 증권주 파동인 경취주 파동후 거래가 확 줄면서 경신(경성증권신탁주식회사)의 총수입과 순익은 계속 줄어들었다.

1922년 12월 경취 경신 합병

이에 따라 당시 회사간 이합집산의 분위기와 맞물려 경취와 경신을 합병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1922년 12월 경취는 경신을 합병하기로 했다.

조선총독부도 두회사를 합병함으로써 증시 침체국면을 타개하고 단기거래의 책임소재를 경취로 일원화함으로써 증시의 체계적관리와 안정책을 수립하는 한편 지금까지는 간접통제만 해왔던 경신에 대해서도 직접 통제하겠다는 의도로 합병을 승인했다.

1923년 4월7일 드디어 경취와 경신은 합병함으로써 경신은 창립 24개월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경취의 부진은 계속 이어졌고 이에 따라 거래제도를 계속 바꿔나갔지만 좀처럼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경취주가는 한량없이 떨어지기만 했다. 이런 와중에 일본에선 대지진이 일어나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동이 일어났다.

이 대지진이 그 유명한 관동(간토)대지진으로 당시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잠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23년 9월1일 관동 대지진 발생

지금으로부터 82년전인 1923년9월1일 오전11시58분 일본 간토에 진도 7.9의 강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인해 공식 사망자는 9만9331명, 행방불명자는 4만3746명에 이르렀다. 도쿄시내 건물의 3분의2가 불에 타 소실됐고 이재민만 340만명이 발생한 대재앙이었다.

이에 일본당국은 피폐한 민심을 잠재우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강간을 하고 도둑질을 하며 불을 지른다”등의 유언비어를 유포했으며 일본인들은 조선인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자경단과 경찰이 살해된 조선인의 시신을 막대기로 헤쳐보고 있다.
 
희생된 조선인은 어린이 부녀자들을 포함, 6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독립신문사와 조선인유학생이 어려운 상황속에서 통계를 내린 희생자의 수는 총6661 명이었다. 물론 이중 지진으로 인한 직접 사망자가 포함됐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숫자임에 틀림없다.

당시 일본말 잘하는 조선인들을 가리기위해 쯔와 츠의 중간발음인 히라카나 글자의 발음이나 기타 어려운 단어들을 말하게 해서 잘 발음하지 못하면 무차별 살해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일본인들도 희생됐다는 소문도 전해져오고 있다.

당시 내무장관인 미즈노 렌타로(水野連太郞)는 3·1독립운동 때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인물로 이런 경험 때문에 대지진이라는 혼란 속에서 조선인들이 보복에 나설 것을 두려워했고 이것이 계엄령 선포의 배경이 됐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지진이 일어나자마자 계엄이 선포된 것을 감안하면 각종 유언비어는 일본 정부 쪽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대지진 이틀후 경취 인취도 휴장 

아무튼 관동대지진으로 일본 증시가 휴장하자 대지진 이틀 뒤 경취와 인취(=인천미두취인소, 한국증시 110년사 1~3편 참조)도 휴장했다.

1923년 9월4일자 신문에 “경취시장은 3일오전 8시반 중매위원회를 열고 전무와 회견한 결과 부득이 휴회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과 “인취도 3일부터 휴회하기로 하였더라"‘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관동대지진의 영향으로 증시는 휴장하고 경기는 더욱 침체됐다. 이후 다시 장이 열렸지만 거래가 극도로 줄어들면서 경취주는 나락없이 떨어지기만 했다.

   
 
1923년 9월4일 중매위원회를 열어 경취를 휴회한다는 내용의 신문기사. 당시 미두 선물거래소였던 인취도 휴회했다.
 
이에 따라 1924년 하반기 무렵엔 경취주 주가가 일시 10원대까지 떨어지기도 했으며 이같은 현상은 1925년까지 이어졌다. 단 2년사이에 7분의 1 이하로 떨어진 것으로 출범당시 주가인 12원에 비해 거의 오른 것이 없는 셈이 됐다.

대지진 두달후인 1923년 11월 증시부양을 위한 두가지 대책이 나왔다. 하나는 1924년 1월4일부터 경취주의 단기거래를 부활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경성증권금융사를 설립, 경취가 갖고있는 2만1932주의 경취주를 이곳에 매각함으로써 경취의 시장내 매각 계획으로 인한 수급우려를 잠재운다는 것이었다.

당시 경취의 자사주 소유는 상법위반 상태였기 때문에 어떡하든지 매각하지 않을수 없었고 이는 증시에 부담이 돼왔기 때문에 이같은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경취 자사주 1만5722주 소각 감자조치 단행 

그러나 경취주 매각이 여의치 않으면서 수급면에서 여전히 증시를 압박하자 경취는 대주주회를 열고 1만5722주를 소각조치하는 감자를 단행했다. 이때 입은 손실은 당시 토지평가금 별도적립금 공납금인당잔액 부동삭소각적립금등의 재원으로 보전했다.

이러한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취는 1925~1926년 일본과 한국의 경기가 잠깐 반짝한데 힘입어 소폭 반등한 것을 빼고는 게속 침체가 이어졌으며 1927년 일본의 금융공황과 1929년 세계 대공황, 1930년의 일본쇼와공황의 여파로 1931년 경취의 운명은 종언을 고하게 된다.

결국 10년간 경취주가 치솟았던 1922년을 제외하곤 계속 내리막길인 셈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20년대 증시도 일반의 예상과 달리 제도 및 법적으로 상당히 체계적이었다는 것과 경기의 뒷받침없는 인위적인 부양책으론 절대 증시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은 고금의 진리라는 것, 또 예나 지금이나 상승기는 화무십일홍이요 하락기는 장기간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음주 토요일에는 쇼와금융공황의 원인과 한국증시에 대한 여파, 세계대공황등을 소개하는 한편 1931년 한국증시에 일어난 대변혁을 소개할 계획이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주신 분 = 증권연구가 위문복 (www.aha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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