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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친일행각에 사형선고까지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경제인’들] 중앙일보 홍진기 편

박지영 기자 | pjy@newsprime.co.kr | 2009.12.10 13:09:42

[프라임경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8년 만에 나온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지난 11월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친일행위자 4389명의 ‘행적’이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 후손들 반발이 거센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몇몇 유족들은 <친일인명사전>을 입수해 꼼꼼히 살펴본 뒤 민족연구소를 상대로 출판물 명예훼손 소송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반면, ‘친일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모른 체 시치미 떼는 몰염치 후손도 있다. 대부분 경제인 친일행위자 유족들이 그렇다. 친일파 명단에 오른 경제인은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를 비롯해 △현대그룹 현준호(현정은 회장 조부)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장인)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 등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경제인들의 친일행위에 대해 차례대로 알아봤다. 다음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재벌’ 시리즈 제3탄 전 중앙일보 회장 홍진기의 친일사례다.


우리나라 최고 재벌인 삼성그룹 역시 친일파 후손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가 ‘안방마님’ 홍라희 여사의 집안 내력 탓이다. 홍 여사 부친인 홍진기(일본식 이름: 德山進一)는 일제강점기 때 판사를 지낸 인물이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한 홍진기는 그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총독부 고등문관을 지냈다. 그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러한 탓에 그의 후손들은 “일제시대 판사직을 맡은 것만으로 친일파로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은 다르다. 민족연구소 측은 “일제 때 사법 관리로 임명받기 위해 노력한 행위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된다”며 “사전에 수록된 인물은 기본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협력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응수했다. 

홍진기의 일생을 되짚어봤다.

◆홍씨 일가 뼛속까지 ‘친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홍진기> 
유민 홍진기는 1917년 3월13일 경기도 고양에서 홍성우 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늘 쪼들렸다. 결혼할 때 처가에서 그의 집안을 보고 탐탁지 않아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집안환경은 홍진기를 더욱 더 채찍질 했다. ‘성공’에 대한 남다른 욕심이 있던 홍진기는 학업에 충실했다. 1934년 3월 경성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7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예과 문과를 수료한 후 일제시대 말인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홍진기는 1942년 3월 경성지방법원 사법관시보를 시작으로 법조계에 첫발을 딛었다. 이후 홍진기는 일제강점기 때 판사를 지내다 해방 뒤 대검 검사로 활동했다.

◆죽산 조봉암 선생 처형

홍진기 일생 중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이승만 독재정부 때다. 1954년 법무부 차관을 거쳐 이듬해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국가보안법 파동’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키도 했다.

3·15 부정선거는 그에게 대통령 신임을 얻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 줬다. 홍진기는 부정선거를 수습해 준 공로를 인정받아 내무장관에 선임됐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정권에 반발하는 시민은 모조리 잡아들였다. 부정선거에 불만을 품기만 해도 ‘빨갱이’로 몰아 있지도 않은 죄를 물었으며, 4·19 혁명 땐 내무장관으로서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발포를 지시하기도 했다. 그의 말 한마디로 당시 수도권에서만 2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특히 홍진기는 항일운동가 죽산 조봉암 선생을 처형하는 데 두 팔을 걷고 도왔다.

“이(승만)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죽산 조봉암은 이 같은 유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작된 간첩혐의 유죄 판결에 대한 재심 청구 바로 다음 날이었다.

죽산 조봉암은 일제치하 때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쟁으로 7년 간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해 헌법제정에 기여한 인물이다.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대학시절 죽산 조봉암 선생 자택을 방문했을 때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산의 손은 일제에 의한 수난의 역사를 말해준다. 악수 하려 내민 손, 분명히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온전하게 남아있고 가운데 세 손가락은 첫 번째 마디가 없다. 일제의 고문과 감방에서의 동상으로 단절된 것이다.”

물론 죽산 조봉암 선생 처형은 그에게 위협을 느낀 이승만 대통령이 이중간첩 혐의를 조작해 ‘정적’을 제거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죽산의 처형을 행동에 옮긴 주역은 바로 홍진기 당시 법무장관이었다. 조봉암 선생은 홍진기가 처형 명령에 서명한 다음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군사법정서 사형선고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홍진기 또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60년 5월, 5·16 쿠데타 이후 설치된 군사법정은 홍진기에게 1심에서 사형을 구형했다.

살아날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던 홍진기에게 뜻밖에 행운이 찾아왔다. 그에게 ‘동아줄’이 돼준 사람은 다름 아닌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였다.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는 고 이병철 회장이 홍진기 타계를 기리며 쓴 조사에도 잘 나와 있다.

당시 이 창업주는 “당신(홍진기)은 평생의 동지요, 삼성을 이끌어 온 같은 임원이요. 사업의 반려자였고, 가정적으론 나의 사돈이었다”며 슬픔을 감추지 않았다.

창업주의 도움을 받은 홍진기는 1961년 12월 혁명재판소 상소심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196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재판기간 중 실제 복역한 건 고작 9개월에 불과했다.

이후 공직에서 물러난 홍진기는 이 창업주의 후원을 받아 1965년 동양방송 사장을 시작으로 1986년에 사망할 때까지 중앙일보 종신사장으로 있었다.

홍진기의 운은 사망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그의 호를 딴 학교가 생긴 것이다. 서울대는 2003년 새로 단장한 법학동 로비를 홍진기 호를 따 ‘유민홀’이라 불렀다.

이를 두고 항간엔 그의 공을 기리고 본받으라는 의미였다고 하지만 정확한 이윤 따로 있다. 그 건물을 기부한 사람이 홍진기의 아들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홍진기는 김윤남과의 사이에서 모두 4남2녀를 두었다.

자식으로는 △장녀 홍라희 여사(이건희 전 삼성 회장 아내,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을 비롯해 △장남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전 주미 대사) △차남 홍석조 보광훼미리마트 회장(전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삼남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 △사남 홍석규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회장) △차녀 홍라영 삼성미술관 리움 총괄부관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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