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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 <3>-인천미두취인소 <하>

선물투기 일제수탈로 쌀값 급등 저항운동 확산

임경오 기자 | iko@newsprime.co.kr | 2005.10.15 11:37:04

인천미두취인소에 대한 감독은 처음에는 주한 일본영사에 의해 위임됐으나 조선총독부 설치이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관장했으며 이때부터 임직원의 매매금지 배당제한 배상책임준비금제도가 시행됐다.

취인소의 주주보통배당금은 20%이내였으나 잉여금이 있을 경우에는 75%이상을 배상책임준비금으로 적립한후 추가배당이 가능토록 되어있었으며 실제로 반기에 75%란 엄청난 배당이 이뤄졌다.(우측 1920년4월10일자 신문보도 사진참조). 현재 쥐꼬리만한 배당으로 많은 상장사들의 주주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겠다.

아무튼 인천미두취인소가 투기장으로 변질되면서 미두가는 급등하기 일쑤였으며 1910년대 후반엔 일제수탈까지 겹치면서 각처에서 동맹파업 쌀소동등의 저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 3.1운동직전엔 극에 달했다.

1914년만 해도 1215만석 수확이라는 대풍년을 기록하면서 1913년 1석에 21원대까지 치솟았던 쌀값이 이해에는 16원대까지 떨어졌으며 이러한 상황은 3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세계1차대전(1914~1918년)이 3년째 이어지면서 전쟁특수로 축적된 일본의 잉여자본은 급기야 조선의 미두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이때 공교롭게도 전쟁특수로 인해 급상승중인 일본증시의 상승과 동조화가 진행되면서 인천미두취인소의 미두 선물가도 치솟자 일본의 투기자본이 조선에 대거 유입, 1917년부터 미두가는 날개를 단듯 급등했다(지난주 中편 상단 그래프 참조).

3.1운동직전 쌀값 폭등 민생고 도탄에 빠져

이같은 상황은 3.1운동 직전까지 급격하고도 지속적인 쌀값 폭등을 가져왔고 일제치하 조선민중의 생활은 도탄의 나락에 빠졌다. 1917년 5월에 이미 "쌀값이 너무 올라 못살겠소" 하는 민중의 부르짖음이 드높았다.

당시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은 분석기사를 실어 쌀값 폭등은 인위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인천미두취인소의 선물투기에 의한 상승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쌀수출은 전년에도 있었으므로 금년에 갑자기 생긴 일은 아니며, 조선의 작년 가을 실수확고가 1253만석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는데 금년의 수이출미는 아직 합계 130만석 이상 넘지는 못하므로 작년보다 많다고 할 수없을 것이며 따라서 재미(在米)는 선내(鮮內)에 상당히 있을 것이요 소비가 증대했다 하더라도 인구 격증과 같은 특수사정이 없는 한 쌀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미가 등귀는 수급의 원칙을 떠난 인위적인 시세다."

 

아무튼 1917년 전반기 1석에 14원50전이었던 쌀값이 2년만인 1919년2월말에는 1석당 43원57전까지 올라 3배나 폭등했다. 이에따라 1918년중반부터 크게 늘어나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나 농민들의 저항은 이런 배경속에 발전해나갔다.

1917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민생의 위기상황은 1918년에 들어와 완화되기는 커녕 더 한층 파국적 상황으로 달렸다. 1917년도 전반기 정미 기준의 석당 쌀값이 14원대에서 후반기에는 22원대로 올랐는데 이것이 1918년도 전반기에는 26-28원대로 올랐고 8월에 접어들면서 한 달새 10원이 폭등하는 최악의 쌀값 폭등이 있게 됐다.

같은해 후반기에는 38원대의 가격이 지속되다가 1919년 1월에는 40원대를 돌파했으며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에는 1석당 43원 57전까지 치솟았다.

식민지당국 쌀염매제로 유화책 시도

선물투기 쌀수탈로 인해 쌀값이 이상폭등하자 위기를 느낀 식민지 당국은 1918년 8월 17일 빈민 구제와 쌀염매를 위한 구제회를 설립, 독지가가 기부한 쌀 조 140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쌀을 시가보다 싸게 파는 염매제를 시행했다. 부족자금은 경성부대은행·회사·기타 유지 인사의 기부로 보충하려는 계획이었다. 일제는 경성뿐만 아니라 인천 평양 대구 전주 마산 등의 지방에서도 구조회를 조직했다.

이에 따라 경성에서 쌀 염매 이틀째인 8월 19일 1만,766명이 일시에 몰려 총247석3두의 쌀이 공급 되었다. 그러나 이 구제회의 쌀 염매는 양도 적고 파는 곳도 몇곳 되지 않으며 쌀을 사기 위해서는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며 그렇게 고생하고서도 사지 못하는 등의 문제점이 많아 결국 조선내 최대의 미소동이 발발하게 됐다.

1918년 8월 28일 경성구제회 미 염매소의 하나인 종로소학교 판매소에는 쌀을 팔았으나 200여명이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못사게 되자 이에 극렬히 항의하는 과정에서 한사람이 쓰러지면서 시위는 걷잡을수 없이 커졌고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이 다수 동원되면서 간신히 진압됐다. 이날 체포된 사람 가운데 30여 명이 재판에 회부돼 27명이 징역 또는 태형을 받았다.

일제 항거 시위 들불처럼 번져

또 목포에서는 100여명이 부당한 가격을 받는 쌀 집을 습격한 사건이 있었고 부산 원산 등지에서는 대중의 궐기를 호소하는 전단이 뿌려지기도 했다. 전남 영광에서는 주민들이 관내의 쌀을 일본이나 항구로 빼내어 가고 있던 무곡상을 죽이려고 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강원도 평강에선 주민 45명이 시위를 일으켜 일본경찰을 부상입히고 진압 경찰관에게 맹렬히 저항하다 일제의 실탄 사격으로 3명이 죽고 나머지가 체포된 사건도 발생했다.

쌀값의 폭등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층은 봉급 생활자들로 이들의 저항도 들불처럼 번져갔다.
 
1916년만 해도 동맹파업이 8건에 참가인원이 고작 362명이었던 것이 쌀값이 폭등한 1918년에는 50건에 5000명 가까이로 격증했다.

1917년 8월 28일 평양 동아연초회사 분공장의 조선인 직공 29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했으며 겸이포 삼릉제철소에서 일하는 직공 50명도 1918년 3월 18일부터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그해 5월 1일에는 만철 경성관리국 용산 공장에 근무하는 1000여 직공이 시간연장 수당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1918년 8월 5일에는 조선인 노동자 300명이 부산역 앞에서 모여 시위를 하고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각 운송점의 짐꾼들로 "항상 주인의 일을 골이 빠지도록 일을 하나 생활비를 지탱치 못할 삯전을 주는 것을 분히 여겨 일어섰다" 고 밝혔다.

그해 8월 12일엔 현재의 모습과 너무도 유사한 파업이 벌어져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전차파업 모습 현재와 너무도 흡사

경성시내 전차를 운행하는 경성전기회사의 차장·운전수들이 동대문안 전차과에 모여 임금을 올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근처 숭경학교에서 집결, 사실상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회사측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해 "안남미를 많이 사다가 너희에게 싸게 팔 터이니 그것을 사다 먹어라" 는 식으로 대응했다.

동맹파업에 들어간 13일 새벽부터 천둥 번개가 치더니 오전 6시부터 10시까지 네 시간 동안 62mm의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로 인해 승객이 몰리게되자 차장·운전수의 파업으로 크게 당황한 회사측은 임시 소집한 공장 직공과 사무원으로 아침에는 겨우 10여 대의 전차를 운행했고 정오경에는 30여대를 운행해 평소의 절반 정도 임시 운행을 시켰다.

회사측의 외국미 염가 분배안에 대해 노동자측이 매우 격분하여 사태가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자 종로경찰서의 중재로 회사측은 급히 태도를 바꾸어 이날 오후6시께 파업단의 요구 중 일부를 받아 들여 타결을 보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졌지만 쌀값앙등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생활고가 급속히 나빠졌음을 나타내주는 사건이었다.

조류독감으로 14만명 사망 민심 흉흉

이러한 민생의 피폐 위에 1918년 10월에는 스페인으로부터 촉발된 조류 독감으로 14만명이 사망하는 재앙마저 덮쳤다.

지금까지 3.1운동 직전에 일어났던 사태와 사회실상은 독립운동의 저항에너지로 축적되고 있었으며 이같은 대중적인 집단저항의 싹은 급기야 1919년 3월1일 33인의 독립선언과 이에 호응한 독립운동으로 발전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결론적으로 인천미두취인소에 투기자본이 유입되면서 쌀선물이 급등한데다 일제의 쌀수탈이 겹치면서 미두가는 폭등했고 이에따라 일제로부터 민심이 급속히 이탈, 일제로의 독립열망과 어우러지면서 3.1운동은 100만명이 넘는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에 놀란 일제는 탄압정책에서 문화정책으로 돌아섰으며 이에따라 이듬해인 1920년 조선 동아일보등 조선인에 의한 신문 발간이 허용됐던 것이다.

3.1운동당시 인천미두취인소 일시 폐장

3.1운동으로 인해 1919년 3~4월인천미두취인소는 일시 폐장을 하게 된다. 당시 그래프에도 단절된 기록이 나온다. 어쨌든 인천미두취인소는 이렇게해서 한국 근대화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한 원인(遠因)이었던 셈이다.

인천미두취인소는 다음주부터 상술하게될 경성현물취인소가 1921년 출범하면서 경성현물취인소 함께 쌍두마차시대를 열었으나 1932년 두 취인소가 합병, 조선취인소로 바뀌면서 조선취인소내 기미부로 편입되고 '인천미두취인소'란 이름은 36년만에 사라지게 된다.

물론 경성 인천 양취인소 합병과정에서 합병반대를 위한 인천시민궐기대회등 일련의 과정은 마치 수년전 선물거래소의 부산이관때 나타난 현상과 너무도 흡사하다. 다음주 새로이 시작되는 경성현물취인소편에서 당시 신문기사등 풍부한 사료와 함께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주신 분 = 증권연구가 위문복 (www.aha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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