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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사記 : KCC ①] '범현대가' 영등포 슬레이트 업체, 대표 종합화학기업 도약

건자재·도료 명실상부 국내 NO.1 "사업 다각화 통한 사세 확장"

선우영 기자 | swy@newsprime.co.kr | 2023.08.17 14:53:44

KCC 사옥. ⓒ KCC


[프라임경제] 최근 건설 관련 업계는 어느 때보다 힘든 보릿고개를 지나고 있다. 국내 업계 역시 급변하는 시대 흐름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건설사記를 통해 국내외를 주도하고 있는 건설 관련 업계 이야기를 논하고자 한다. 이번 회차는 '종합화학기업'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KCC' 태동과 역사에 대해 살펴본다. 

범현대가 계열사 'KCC(002380)' 탄생은 약 65년 전인 1958년, 정상영 회장(창업주)이 개인사업을 시작하면서다. 6·25 전쟁 이후 지독한 어려움 속에서 자립의 꿈을 키운 정상영 회장은 슬레이트와 같은 건자재 사업을 시작으로 업계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슬레이트 사업으로 에너지를 축척한 KCC는 건자재는 물론 △도료 △유리 △창호 △단열재부자재 등 사업 영역을 확장, 오늘날 국내 대표 '종합화학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상영 회장은 서울 영등포구에 작은 회사를 일으킨 이래 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그는 현존하는 국내 기업인 중 제 자리에서 가장 오래 경영 현장을 지켜온 기업인이다. 그 자신이 토목기사요, 건축기사요, 엔지니어였다. 깊은 역사로 터득한 경험과 기술력으로 입지를 다진 KCC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롯이 선 자립의 길 "슬레이트로 건자재 대표 기업 도약" 

KCC 뿌리는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업자 정상영 회장은 22살이 되던 해 '개인 사업 각오'를 다졌다. 그는 '큰 형'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유학 권고를 마다한 채 자립의 길을 택했다.

정상영 회장은 산업보국 정신을 강조한 정주영 명예 회장 당부 아래 회사 이름을 '금강'으로 결정했다. 몇 달의 준비를 거친 후 마침내 1958년 8월12일 서울 영등포에 슬레이트 사업을 영위하는 KCC 모태 '금강스레트공업주식회사(이하 금강스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은 수월치 않았다. 6.25 전쟁이 끝난 지 불과 5년. 한국은 세계 최빈국으로 추락했고, 모든 산업은 불모지로 전락했다. 금강스레트 자산 역시 녹슨 슬레이트 초조기 1대와 몇 안 되는 스태프들 젊음이 전부였다.

하지만 금강스레트는 좌절하지 않고 잿더미 속에서 희망의 싹을 키워나갔다. 갖은 지혜를 모은 결과 1960년 6월 마침내 슬레이트 생산기술을 구축, 본격 생산에 돌입할 여건을 마련했다.   

물론 당시 금강스레트는 슬레이트 사업에 있어 후발주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상영 회장은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치열한 경쟁 속 터득한 노하우와 경험을 통해 성공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의 결실 끝에 영등포 공장은 두 차례 증설(1962년 말까지)로 몸집을 키웠으며, 회사는 1964년 '자산·매출 1억원 돌파'라는 기염을 토했다. 

초기 금강스레트주식회사. ⓒ KCC


"사세가 확대되자 '부산' 우동에 공장을 신설(1965년 9월)했다. 연이어 1969년 8월 수도권 수원에 공장을 설립, 생산 설비를 가동했다. 수원공장은 이후 40년 가까이 KCC공장 모체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새로운 공장의 산실로 거듭났다."

금강스레트는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 중요 거점도시에 영업소(1962~1968년까지)를 두면서 영업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특히 당시 본사가 유통 수요 소매점과 직접 거래하는 '소매점 직판영업체제'를 도입하면서 정부나 산화기관으로부터 착실히 일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71년 박정희 정부가 시행한 '새마을운동 지붕개량사업'은 슬레이트 업계는 물론 금강슬레트 대형 호재로 작용하기 충분했다. 이를 기회로 삼아 지붕개량사업이 마무리되는 시점, 업계 상위권에 랭크되는 쾌거를 이뤄냈다. 특히 1969년 12월 서울 중구 저동에 조성된 최초 본사 사옥(5층)은 이런 성장의 산실이다. 

금강슬레트는 파죽지세로 증권시장에 상장, 1973년 6월25일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명을 '주식회사 금강'으로 변경(1976년 3월)하면서 강남구 신사동(현 서초구 잠원동)에 신설한 사옥으로 이전했다.

이런 금강은 본격 건자재 외에도 사업 다각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바로 1970년대 대형화재로 건축계에 불연내장재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관련 단열재 사업에 진출한 것.   

실제 금강은 1975년 2월 짐펠캄프의 1만톤 프레스로 압착한 '밤라이트', 밤라이트에 나무무늬를 프린트한 '나무라이트'를 연이어 출시했다. 그 결과 변변한 불연천장재가 없어 고심하던 건축계 큰 환영을 받았다.

무엇보다 1976년 1월와 1978년 2월에 선보인 미네랄울과 글라스울은 무기질 보온 단열재 대표 주자로 업계에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이어 1984년 6월 '금강세라크울' 상표로 '세라믹파이버'를 제시하며 그간 수입에 의존하던 산업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단열재 수준을 넘어 내화재로써의 역할도 가능한 세라믹파이퍼로 인해 광물을 원료로 한 인공섬유 'MMF(MAN·MADE·FIBER) 3종 세트'를 갖춘 기업으로 거듭났다. 언양공장(1981년)과 여천공장(1985년), 여주공장(1987년) 전주1공장(1994년) 준공 등은 회사 성장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울산공장(1983년) 전경. ⓒ KCC


이런 금강은 새로운 먹거리에 대한 과감함을 놓치지 않았다. '금강레저'를 세워 레저사업에 진출했으며, 석고보드 사업은 물론 광산업체 '고려시리카'를 출범하기도 했다. 특히 1982년 진출한 유리 사업을 통한 성과는 매우 뚜렷하다. 

당시 아파트와 건물 창구조 유리창 위주 변화와 자동차 산업 성장세가 유리 수요를 급증할 것이라는 판단이 적중하면서 사세를 3배로 늘리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이에 힘입어 1995년 3월 일본 아사히글라스와 맺은 '자동차 유리 기술협약'은 2000년 합작 투자를 통한 '코리아오토글라스' 설립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외에도 변압기 진공차단용 세라믹 사업을 통해 관련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등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면서 성장을 이뤄낸 금강은 '건설업'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65년 5월 토목·건축업과 도로포장공사업 면허를 획득하면서 시작을 알린 건설사업부는 업계에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틈새시장인 소규모 도급공사로 실적을 쌓은 이후 1978년 사우디아라비아 진출과 함께 국내외 다양한 토목·건축 부문 성과로 위상을 확보했다." 

이런 건설사업부는 1989년 1월 금강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금강종합건설'로 재탄생했다. 이를 통해 1990년대 말까지 27개 공장건축물과 28개 아파트를 시공했으며, 한국건축문화대상(1992년)과 서울시 건축상(1993년) 등을 수상하면서 실적을 쌓아갔다. 

◆'고려화학' 성장과 합병, 종합화학기업 'KCC' 탄생

도료 전문 기업 '고려화학'은 금강과 함께 KCC 모태이자 마지막 퍼즐이다.
 
정상영 회장은 특유 날카로운 판단으로 또 다른 도전에 나섰다. '현대조선(현 HD현대)' 조선소 건설 기공식(1972년 3월)을 계기로 선박도료를 주목한 것이다. 

정상영 KCC 명예회장. ⓒ KCC


이에 1974년 7월18일 '고려화학주식회사' 출범과 함께 고려페인트(현 KCC페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려화학은 현대조선을 눈여겨보던 덴마크 글로벌 브랜드 '헴펠'과 짝을 이뤘고, 울산에 도료공장을 완공(1975년 7월)했다. 기술 인재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수많은 제품을 제조해야 하는 만큼 해당 분야 유기화학 기술자들이 광범위하게 필요했다. 각자 전력이 다르다 보니 한동안 도료 기술 '제자백가' 시대가 열렸다. 물론 정상영 회장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다양한 전력의 기술자들을 '고려화학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나갔다."

이런 탓일까. 영국 선급협회 로이드로부터 선박 사업 진출에 필요한 선박용 용접도료 9개 품목과 폴리에스테르 레진 2개 품목에 대한 인증(1977년 7월)을 받으면서 기술 수준을 국내외에 입증했다. 더불어 그해 일본 카와카미 도료와 신토 도료로부터 분체와 음이온 전착도료 기술을 도입하면서 업계 두각을 드러냈다.

이런 노력들은 다품종, 그리고 양질의 도료개발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실제 1976년 6월 국산자동차 '포니' 자동차 도료 적용을 시작으로 철재·목재·플라스틱 등 소재를 위한 다양한 품종 도료를 개발했다. 미흡한 분야는 과감하게 국외로 눈을 돌려 1984년까지 10여건의 기술 도입을 이뤄냈다. 

무엇보다 고려페인트로 마감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의 OSTT 강관재킷(1970년 후반)은 눈부신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컨테이너 도료 시장에 있어 점유율 40%까지 확보, 글로벌 1위로 도약했다.

고려화학은 이런 성장을 토대로 1978년 3월까지 주요 도시에 영업소를 설치, 영업망을 확대했다. 아울러 1981년과 1982년 각각 런던과 샌프란시스코 지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울산 동구 신공장 완공(1984년)은 물론, 한국전력공사 원자력발전소용 내방사선도료 공급(공급울진원자력발전소 9·10호기)도 소기의 성과로 꼽힌다. 

이런 탓일까. 1985년 마침내 도료 업계 선두로 도약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기업공개(1985년 11월)로 대한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이외에도 1992년 싱가포르 해외 법인 설립과 함께 '수출 1억달러 달성'이라는 의미 있는 결과도 도출하면서 명실상부 '국내 최대 도료 업체'로 성장했다.  

금강스레트, 금강, 고려화학 CI. ⓒ KCC


"금강·고려화학의 활약은 향후 KCC 출범으로 이어졌다. KCC는 현재까지도 국내외 건자재와 도료 부문에서 업계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금강·고려화학은 양사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내부적으로 기업 뿌리 공유 및 제도·조직 통합 운영을 추진했다. 국내 소비자에게 선사하는 이미지 분산을 제거하는 한편 해외에서는 화학전문기업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1994년 서울 서초동 신사옥 이전과 함께 1995년 10월 기업 아이덴티티(CI)를 새롭게 정립했다. 결과적으로 KCC 파란색 바탕 '통합 로고' 탄생과 동시에 그룹 명칭도 종전 'Keumkang Limited'에서 'Keumkang Chemical Co. Ltd.(KCC)'로 변경했다. 

이후 2000년 금강·고려화학이 합병한 통합법인 '금강고려화학'이 출범, 2005년 2월 사명을 현재 '주식회사 KCC'로 변경했다. 2007년 BI 역시 고려 페인트에서 'KCC Paint'로 변화하는 등 초일류 정밀화학기업을 위한 출사표를 던졌다. 마침내 정몽진 회장 경영체제, 즉 '2세 경영 서막'이 본격 가동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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