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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최고존엄' 손양원목사 사후 64년만에 중동고 졸업

 

박대성 기자 | kccskc@hanmail.net | 2014.02.13 15:16:38

[프라임경제] 세계 교회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자 '20세기 사랑의 원자탄'으로 추앙받는 고 손양원목사(1902~1950)가 입학 95년, 사후 64년만에 서울중동고를 명예졸업하게 됐다.

서울중동고등학교총동문회(회장 백강수)는 13일 오후 전남 여수시를 방문, 김충석 시장에게 손양원 목사 명예졸업장을 전달하고 율촌면 손목사 순교기념관 등을 방문했다.

이날 행사에는 손양원 목사의 딸인 손동희 권사 등 유족과 사단법인 민족지도자손양원목사기념사업회(이사장 박세훈) 위원 20여명이 참석했다.

   
손양원 목사(맨 왼쪽)가 1939년 7월 여수 애양원에 부임하면서 촬영한 기념사진. ⓒ 애양원
고 손양원 목사는 1902년 경남 함안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7살부터 새벽기도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한일 합방 이후 일제가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신앙의 정신으로 불복종하다가 간신히 칠원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면서 같은 해인 1919년에 서울 안국동에 있던 '중동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기록에 의하면 손양원은 이 중동학교에서 낮에는 학업에 열중하고 밤에는 만두를 팔면서 고학을 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부친이 고향에서 독립운동으로 징역을 살게 돼 손 목사에게는 심적인 고통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은 끝에 손 목사는 끝내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손 목사는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여수 애양원교회에 부임한 뒤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당시 손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1942년 투옥됐다.

손 목사는 '전향(轉向·덴꼬)'해야 출옥할 수 있다는 담당 검사의 위협을 뿌리치고 광주 형무소에서 경성 구금소, 청주 구금소 등으로 옮겨 다니며 광복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서울 중동고 정문에 손양원 목사 명예졸업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 중동고 총동문회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에는 손 목사의 두 아들(손동신, 동인)이 공산당원들에게 끔찍히 살해당하는 고통을 겪어야했다. 하지만, 손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가르침에 충실, 자신의 두 아들을 사망케 한 공산당원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는 등 사랑을 실천했다.

손 목사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공산군에게 체포돼 여수시 미평동에서 총살당하며 48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손 목사의 거룩한 생애는 많은 개신교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교회신뢰가 추락하는 이때 손 목사의 박애정신은 교회 신뢰회복의 단초가 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동고 관계자는 "이번 명예졸업장 수여를 계기로 한국 교회의 리더십이 이 사회와 교육계 속에서 더욱 건강하고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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