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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 없는 '페라리 루체' 전동화로 다시 쓴 정체성

브랜드 첫 순수 전기차가 던진 질문…전동화 시대의 '페라리다움' 재정의

노병우 기자 | rbu@newsprime.co.kr | 2026.05.27 10:30:56
[프라임경제] 페라리에게 순수 전기차는 새로운 파워트레인 하나를 추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엔진 회전과 배기음, 변속의 감각, 노면을 밀어내는 기계적 반응으로 브랜드의 감각을 쌓아온 회사가 내연기관 없이도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첫 번째 무대다.

그런 점에서 페라리 루체는 신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페라리 역사상 첫 순수 전기차라는 상징성은 물론이고, 전동화가 브랜드의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변화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페라리는 지난 26일 로마 벨라 디 칼라트라바에서 브랜드 최초의 순수 전기차 페라리 루체를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장소 선택부터 상징적이다. 1947년 페라리 125 S가 로마 그랑프리에서 첫 승리를 거둔 도시로 돌아와, 79년 뒤 엔진 없는 페라리를 내놓았다. 과거의 출발점에서 미래의 출발점을 선언한 것이다.

페라리 루체는 2022년 페라리 캐피털 마켓 데이(Capital Market Day)에서 발표된 이후 수차례 재확인된 바 있는 브랜드의 멀티 에너지 전략이 결실을 맺은 모델이다. ⓒ 페라리


루체는 페라리가 2022년 캐피털 마켓 데이에서 밝힌 멀티 에너지 전략의 결과물이다. 내연기관, 하이브리드, 순수 전기 파워트레인을 병렬로 가져가겠다는 전략 안에서 전기차는 기존 페라리를 대체하는 선택지가 아니다. 페라리는 루체를 통해 전동화를 받아들이되, 그 기술을 브랜드 경험 안으로 끌어들이는 쪽을 택했다.

◆엔진이 사라진 자리, 페라리는 감각을 다시 설계

전기차 시대의 페라리가 마주한 가장 큰 질문은 명확하다. 엔진이 사라져도 운전자가 여전히 페라리를 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가.

루체의 개발 방향은 이 질문에 맞춰져 있다. 페라리는 전기 엔진부터 배터리 팩까지 핵심 부품을 마라넬로에서 직접 설계, 개발, 생산한다. 전동화 부품을 외부 기술의 조합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브랜드가 통제 가능한 기술 영역으로 끌어안은 셈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출원된 특허가 60개 이상이라는 점도 같은 맥락에 있다.

루체의 숫자는 강하다. 네 개의 전기엔진, 122㎾h 배터리, 합산 최고출력 1050cv,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2.5초, 시속 200㎞까지 6.8초, 최고속도 시속 310㎞ 이상, 530㎞ 이상의 주행거리. 고성능 전기차 시장에서 페라리라는 이름이 기대하게 만드는 성능 지표는 충분히 채웠다.

페라리 루체의 디자인은 조니 아이브 경과 마크 뉴슨이 이끄는 크리에이티브 전문가 그룹 러브프롬(LoveFrom)과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 페라리


하지만 루체에서 더 중요한 대목은 그 숫자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전기 파워트레인의 즉각적인 토크는 빠른 가속을 만들지만, 스포츠카 브랜드에는 다른 숙제도 남긴다. 너무 쉽고 강한 가속은 때때로 운전자의 조작 감각을 흐리게 만들 수 있다. 페라리가 토크 매니지먼트와 패들 조작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루체는 스티어링 휠 오른쪽 패들을 통해 가용 토크를 단계적으로 높이고, 왼쪽 패들로 에너지 회수율과 감속감을 조절하도록 했다. 전기차의 회생제동과 토크 전달을 페라리식 운전 경험 안으로 다시 배열했다. 내연기관 스포츠카에서 운전자가 엔진 회전과 변속, 감속을 조율하던 감각을 전기차 구조 안에서 되살리려는 접근이다.

사운드 역시 중요한 장치다. 전기차는 조용하다. 페라리에게 그 조용함은 장점인 동시에 결핍이 될 수 있다. 루체는 액슬 중앙에 배치한 정밀 가속도계로 회전 부품의 진동과 질감을 포착하고, 이를 필터링·증폭해 주행 상황에 맞는 소리로 구현한다. 인위적인 배기음 흉내가 아니라, 차량의 메커니즘에서 나온 신호를 주행 경험의 일부로 만든다는 설명이다.

페라리 역사상 최초로 넉넉한 공간의 4도어 5인승 차량이 탄생했다. ⓒ 페라리


페라리가 말하는 '기능적 사운드'는 그래서 감성 장비가 아니다. 운전자가 차의 상태를 느끼고, 속도와 부하, 주행 모드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인터페이스다. 전기차가 지운 감각을 소리로 장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기차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신호를 페라리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가깝다.

◆'4도어 5인승' 페라리, 전기차가 만든 새로운 문법

루체가 던지는 또 다른 변화는 차체 형식에 있다. 페라리는 루체를 브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넉넉한 공간을 갖춘 4도어 5인승 모델로 설계했다. 그동안 페라리의 전통적인 트랜스액슬 구조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패키징이다. 전기차 전용 아키텍처가 차체 비율과 실내 구성을 새롭게 열어준 결과다.

이 변화는 페라리에게 조심스러운 확장이다. 4도어 5인승이라는 형식은 자칫 브랜드의 스포츠카 정체성을 희석시킬 수 있다. 반대로 전기차 플랫폼이 제공하는 낮은 무게중심, 배터리 배치 자유도, 네 바퀴 독립 제어 능력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이전의 페라리와 다른 유형의 주행 경험을 만들 수도 있다. 루체는 후자에 베팅한 모델이다.

인터페이스는 입력(조작)과 출력(디스플레이)이라는 명확한 구조적 원칙에 따라 설계됐다. ⓒ 페라리


차량 동역학도 이 방향에 맞춰 설계됐다. 루체는 각 바퀴에 전기엔진을 배치하고, 전자 제어식 액티브 서스펜션과 사륜 조향 시스템을 통합 제어한다. 차량 제어 장치인 VCU(Vehicle Control Unit)는 초당 500회 데이터를 업데이트하며 파워트레인과 차량 동역학을 함께 관리한다. 완전히 새로워진 사이드 슬립 컨트롤X(Side Slip ControlX)와 연계해 토크, 접지, 차체 움직임을 정교하게 조율한다.

전기차의 장점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기존 내연기관 구조보다 각 바퀴를 독립적으로 다룰 여지가 크다. 페라리는 이 자유도를 속도 경쟁에만 쓰지 않았다. 민첩성과 안정성, 승차감, 회생제동 감각을 하나의 주행 경험 안에서 맞물리게 하려 했다. 고성능 전기차 시장에서 흔한 '빠른 차'의 문법과 거리를 두려는 대목이다.

디자인에서도 같은 고민이 이어진다. 루체는 조니 아이브 경과 마크 뉴슨이 이끄는 러브프롬(LoveFrom)과 협업해 완성됐다. 페라리 디자인 스튜디오 바깥의 시선을 들여왔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외관과 실내,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하나의 디자인 언어로 묶고, 기계식 버튼과 다이얼, 토글, 스위치를 디지털 디스플레이와 함께 배치한 구성도 눈에 띈다.

런치 모드(Launch Mode)시에는 5초 스톱워치가 자동으로 활성화된다. ⓒ 페라리


전기차 시대의 실내는 대형 화면 중심으로 흐르기 쉽다. 루체는 그 흐름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운전자가 손끝으로 조작하는 물리적 감각을 남기면서, 필요한 정보는 디지털 방식으로 정리했다. 페라리가 전동화 시대에도 '운전자가 차를 다룬다'는 감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다.

공기역학과 패키징도 루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페라리는 루체가 브랜드 로드카 역사상 가장 낮은 저항계수를 달성했다고 설명한다. 능동형 공기역학 그릴은 냉각 성능과 공기저항을 실시간으로 조율하고, 능동형 차고 조절 기능은 고속주행 시 차체 전면을 10㎜ 낮춘다. 전동화가 가져온 효율의 과제를 페라리식 공기역학과 섀시 기술로 해결하려는 구성이다.

배터리도 에너지 저장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122㎾h 배터리 팩은 차체 구조의 일부로 설계됐고, 센터 터널을 없앤 배치로 실내 공간을 넓혔다. 배터리 하우징과 차체 골격이 결합된 구조는 기존 4도어 모델 대비 굽힘 강성을 25%, 비틀림 강성을 35% 이상 높였다. 전기차의 무게를 감수하는 대신, 그 구조를 차체 강성과 공간 설계에 활용했다.

페라리 루체의 파격적인 혁신은 커스텀 휠 디자인에서 정점을 찍는다. ⓒ 페라리


루체가 성공하려면 전기차로서 뛰어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시장에는 빠르고 조용하며 효율적인 고성능 전기차가 많다. 페라리의 첫 순수 전기차가 설득해야 할 대상은 숫자에 민감한 소비자만이 아니다. 더 까다로운 질문은 따로 있다. 엔진이 없는 차에서도 페라리의 긴장감과 몰입감, 조작의 즐거움이 살아 있는가.

페라리는 루체를 통해 그 답을 제품으로 내놓았다. 네 개의 전기 엔진과 통합 제어 기술, 기능적 사운드, 물리적 조작계, 4도어 5인승 아키텍처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기술 요소가 아니다. 모두 엔진 이후의 페라리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다.

루체의 진짜 의미는 페라리의 첫 전기차라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차는 페라리가 전동화를 피할 수 없는 변화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변화에 끌려가기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정의하겠다는 선언이다. 엔진 없는 페라리는 이제 세상에 나왔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루체가 빠른 전기차를 넘어, 전기차 시대의 페라리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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