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전기차의 역할이 충전 받는 이동수단에서 전력을 저장하고 다시 공급하는 에너지 자산으로 확장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제주도에서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전기차-전력망 연계 서비스인 V2G(Vehicle-to-Grid) 시범서비스를 시작했다.
이번 시범서비스의 핵심은 기술 자체보다 적용 대상의 변화에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하반기 제주도에서 모빌리티 플랫폼 쏘카와 함께 V2G 시범서비스를 운영해왔다. 이번에는 실증 대상을 일반 제주도민으로 넓혔다. 법인·플랫폼 차량 중심의 실험에서 실제 고객의 생활권으로 V2G 활용 범위가 들어온 셈이다.
V2G는 전기차 배터리와 전력망을 연결해 전력을 양방향으로 주고받는 기술이다. 기존 전기차가 전력망에서 전기를 받아 충전하는 구조였다면, V2G는 전기차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을 필요할 때 다시 전력망으로 보낼 수 있다. 이 구조가 자리 잡으면 전기차는 단순 이동수단을 넘어 '움직이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역할을 하게 된다.

현대차그룹의 제주도 V2G 실증 시범서비스 참여 고객의 제주시 논세길 소재 자택에 설치된 양방향 충전기를 기아 EV9이 이용하는 모습. ⓒ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차그룹은 제주도청과 협력해 V2G 기술이 적용된 현대차 아이오닉 9 또는 기아 EV9을 보유한 제주도민 가운데 최종 참여 고객 40명을 선정했다. 참여 조건은 자택이나 직장에 V2G 양방향 충전기를 설치할 수 있는 고객이다. 현대차그룹은 다양한 이용 패턴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 실사를 거쳐 직업군과 거주지를 고르게 배분했다.
참여 고객에게는 양방향 충전기가 무료로 설치된다. 시범서비스 기간에는 전기차 충전 요금도 전액 지원된다. 일반 고객 입장에서는 전기차를 충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차량 배터리를 전력망과 연결해 활용하는 새로운 이용 방식을 경험하게 된다.
◆제주에서 시작하는 이유
현대차그룹이 V2G 실증 무대로 제주를 택한 배경에는 지역 전력 구조가 있다. 제주는 풍력과 태양광 발전 비중이 높은 지역이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변동성이 크다. 낮 시간대 발전량이 수요를 웃돌면 잉여 전력이 발생하고, 전력 수요가 높은 시간대에는 안정적인 공급 관리가 필요하다.
V2G는 이 간극을 줄일 수 있는 수단으로 주목받는다. 낮에 생산된 재생에너지 잉여 전력을 전기차 배터리에 저장했다가, 전력 수요가 높아지는 시간대에 다시 전력망으로 돌려보내는 방식이다. 전기차가 많아질수록 개별 차량 배터리는 하나의 분산형 저장장치가 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의 제주도 V2G 실증 시범서비스 참여 고객의 제주시 한경면 소재 자택에 설치된 양방향 충전기를 현대자동차 아이오닉 9이 이용하는 모습. ⓒ 현대자동차그룹
이에 V2G는 전기차 보급 확대에 따른 충전 수요 증가를 넘어, 전력망 운영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기술로 평가된다. 전기차가 전력망에 부담을 주는 소비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력 수급 안정화에 기여하는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어서다.
현대차그룹이 이번 시범서비스에서 일반 고객의 다양한 이용 패턴을 확인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V2G가 실제 서비스로 작동하려면 차량이 언제 충전되고, 언제 주차돼 있으며, 어느 시간대에 전력망으로 전력을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생활 데이터가 필요하다. 실험실이나 특정 사업자 차량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배터리 활용 남은 과제는 상용화
다만 V2G가 본격적인 서비스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기술 검증만으로는 부족하다. 고객이 자신의 차량 배터리를 전력망 자원으로 제공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충전·방전 시간 관리, 배터리 수명 우려, 전력 제공에 따른 보상 구조, 충전 인프라 표준화 등이 함께 풀려야 한다.
이번 시범서비스에서 충전기 설치와 충전요금을 지원하는 것도 초기 참여 장벽을 낮추기 위한 조치다. 앞으로 상용화 단계로 넘어가려면 전기차 고객이 체감할 수 있는 경제적 보상과 서비스 편의성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현대차그룹의 제주도 V2G 실증 서비스 현장에서 전기차들이 양방향 충전기에 연결돼 실제 충·방전을 통해 전력을 주고 받고 있다. ⓒ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차그룹은 이번 제주 시범서비스를 계기로 정부, 지방자치단체 등과 국내 V2G 생태계 조성 및 산업 활성화에 속도를 낸다는 계획이다. 현대차그룹은 제주도의 에너지 지산지소, 즉 지역에서 생산한 에너지를 지역에서 소비하는 구조를 뒷받침하고, 제주도의 2035년 탄소중립 비전 달성에도 V2G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시범서비스는 전기차가 실제 고객의 집과 직장에서 전력망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생활권 실험이다. 전기차 배터리를 단순히 주행을 위한 장치로 볼 것인지, 아니면 재생에너지 시대의 분산형 에너지 자산으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시험대다.
전기차 보급이 늘어날수록 충전 인프라와 전력 수급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V2G는 그 부담을 다시 자산으로 바꾸려는 시도다. 제주에서 시작된 이번 일반 고객 대상 시범서비스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기차가 더 이상 전기를 쓰기만 하는 차가 아니라, 전력망을 함께 움직이는 배터리로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