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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규의 AI 컨텍스터 선언④] 텍스터는 속도로 이기고, 컨텍스터는 구조로 이긴다

 

최홍규 EBS 연구위원 | press@newsprime.co.kr | 2026.04.22 09:52:58
[프라임경제] 속도는 끝났다. 누구나 빠른 세상에서 빠름은 더 이상 무기가 아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자. 직장인 A씨는 AI로 경쟁사 분석 보고서를 두 시간 만에 50페이지 완성한다. 직장인 B씨는 같은 시간 동안 다섯 페이지를 쓴다. 이튿날 임원 회의. 결정을 이끌어낸 쪽은 B씨다. A씨는 속도로 이겼지만, B씨는 구조로 이겼다. 가상의 상황이지만, 실제 현장에서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하는 관리자들이 적지 않다. A씨의 보고서에는 정보가 있었고, B씨의 보고서에는 판단이 있었다. 그 차이다.

이 차이가 왜 생기는지를 실증적으로 규명한 연구가 있다. 파브리치오 델라쿠아(Fabrizio Dell'Acqua) 등 하버드 경영대학원 연구팀이 2026년 발표한 논문 「들쭉날쭉한 기술 최전선 항해하기(Navigating the Jagged Technological Frontier)」는 AI 시대 생산성의 역설을 정밀하게 드러낸다. 글로벌 경영컨설팅 기업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컨설턴트 758명을 대상으로 한 무작위 대조 실험에서 AI를 활용한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12.2% 더 많은 과제를 완료했고, 25.1% 더 빠르게 마쳤다. 결과물 품질도 30% 이상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속도에서는 AI가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연구팀이 두 번째로 설계한 실험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숫자 데이터와 맥락적 판단을 동시에 요구하는, AI가 잘 못하는 영역의 과제를 주었더니 AI를 쓴 컨설턴트의 정답률이 쓰지 않은 컨설턴트보다 오히려 19%포인트(p) 낮았다. AI를 썼기 때문에 더 틀린 것이다. 연구팀은 이 현상에 '들쭉날쭉한 기술 최전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AI가 잘하는 과제와 오히려 발목을 잡는 과제의 경계가 불규칙하고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경계가 어디인지 속도를 쫓는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AI 결과물을 더욱 조심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오픈AI 연구원 애덤 칼라이(Adam Tauman Kalai)와 조지아 공과대학교의 산토시 벰팔라(Santosh S. Vempala)가 2024년 발표한 논문 「보정된 언어 모델은 반드시 환각을 일으킨다(Calibrated Language Models Must Hallucinate)」는 흥미로운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AI는 접해본 적 없는 낯선 정보 앞에서 틀린 답을 마치 맞는 것처럼 내놓을 수 있다. 이를 'AI 환각'이라 부른다. 최근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이런 오류는 많이 줄었다. 그러나 논문이 지적하듯, 개선이 오류의 빈도를 낮출 수는 있어도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결국 AI가 생성한 결과물이 아무리 매끄러워 보여도, 그것을 맥락에 맞게 검증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속도를 내는 손이 아니라, 구조를 보는 눈이 그 검증을 가능하게 한다.

현장에서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AI 활용 교육을 받은 직후 학습자들이 제출하는 과제의 완성도는 눈에 띄게 올라간다. 문장도 정돈되고 구성도 깔끔하다. 그런데 "왜 이 방향으로 접근했나요?"라고 물으면 막히는 경우가 생긴다. AI가 제안한 방향을 다듬은 것이지, 스스로 방향을 잡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속도는 올랐지만 구조는 없었다. 

기업 현장도 마찬가지다. AI로 수십 페이지 분량의 분석 자료를 가져왔는데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결정해야 하나"라는 질문 앞에서 멈추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과물은 있는데 결정이 없는 것이다. 텍스터는 AI가 만들어준 속도 위에 올라타고, 컨텍스터는 그 결과물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를 스스로 설계한다. 분량이 아니라 판단이, 속도가 아니라 구조가 회의실을 지배하는 것이다.

AI가 속도를 평등하게 나눠준 지금, 경쟁의 기준은 바꼈다. 누가 더 빨리 만드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왜 선택했는지가 그 사람의 값어치를 결정한다. 속도는 AI에게 넘겼다. 남은 것은 구조다. 그리고 구조는 정보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맥락을 읽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설계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 AI로 만든 결과물을 다시 보자. 거기에 우리의 판단이 있는가, 아니면 AI의 제안이 있는가. 그 답이 우리가 속도의 게임을 하고 있는지, 구조의 게임을 하고 있는지를 결정한다.

최홍규 EBS 연구위원 / 미디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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