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트
  • 메일
  • 스크랩
  • 글자크기
  • 크게
  • 작게

[현장 스케치] "버티는 죄, 그리고 떠나는 벌" 구룡마을, 끝나지 않은 철거의 시간

이주율 66.5% 감춰진 마지막 터전 속 목소리 "조건 없는 이주 없다"

김주환 기자 | kjh2@newsprime.co.kr | 2025.04.24 11:32:07

[프라임경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 고급 아파트 단지와 대형 마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마주한 풍경은 낯설다. 좁은 골목과 낮은 슬레이트 지붕 그리고 부서진 담장이 얽힌 이곳은 서울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이다.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8지구. = 김주환 기자

넓고 깨끗이 닦인 아스팔트 도로 건너엔 '출입 금지' 안내문이 빼곡히 붙은 폐가가 줄지어 서 있다. 일부 구획은 이미 철거가 시작해 뼈대만 남은 건물들이 유령처럼 뻗은 모습이다. 하지만 구룡마을 371세대 미이주 가구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시가 발표한 공식적 이주율은 약 66.5%. 

구룡마을은 이전 수십년 동안 도시정비 사업 대상지이자 부동산 정책 상징적 시험대였다. 하지만 몇 줄짜리 행정적 수치만으로 정의되기엔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국민들이 존재하고 있다. 

# 몇십년을 살았는데 그냥 나가라니…갈 곳도, 그럴만한 돈도 없어요. 임대주택이라도 들어가려면 그만한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도 조건만 맞으면 나갈 수 있어요. 그게 1순위에요. - 구룡마을 거주 70대 A씨  


A씨 가족은 1989년 당시 이뤄진 강제 철거로 인해 이곳 구룡마을로 흘러들어왔다.

"비닐하우스처럼 지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여기가 제일 편했어요. 우리 애들도 여기서 다 컸고요."

A씨가 가리킨 담장 너머는 이미 철거가 시작된 구역이다. 그러나 일부 창문 곳곳에는 아직 꺼지지 않는 희미한 불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구룡마을 주택이 나무판자로 막혀있다. = 김주환 기자

구룡마을은 '행정 분류' 상 공장부지에 해당한다. 이에 주민들은 주거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전입신고가 어렵고 재산권도 보호받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부동산세·주민세·전기세 등 세금에 있어 예외는 없었다.

 # 여긴 공장부지 아니에요. 하지만 세금은 공장부지로 다 받아먹었잖아요. 우리같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데도, 마치 짐승이 사는 곳처럼 취급해요. 우리가 뭐 개돼지입니까? 

- 구룡마을 거주 60대 B씨 


이들 거주민들에게 있어 보상 자체보다 중요한 건 "이주 후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다.

서울시와 SH공사는 지난해 11월 △임대 보증금 전액 면제 △임대료 최대 100% 감면 등이 포함된 '이주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일부 거주민들은 여전히 이주를 망설이고 있다. '다음 삶'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 다수 미이주 세대의 경우 보증금 및 이사 비용보단 '적응 문제'를 걱정하기도 했다. 

# 사는데 완벽한 곳이 어디 있어요. 중요한 건 '내가 낯설지 않은 곳'이라는 거죠. 

- 구룡마을 거주 60대 C씨  


구룡마을 내부. = 김주환 기자

SH공사에 따르면, 현재 구룡마을 부지에 3800가구 규모 자연친화형 주거단지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 2월 토지 수용 개시를 완료했으며, 오는 7월까지 지장물 수용재결을 마무리해 하반기 본격 철거에 돌입한다는 방침이다. 


SH 관계자는 "1107가구 가운데 750여가구가 선이주를 마쳤고, 미이주 세대에 대해 지속적 상담하고 있다"라며 "불법 입주권 거래나 조합원 모집 시도에 대해 강력히 단속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보상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어디서 다시 살 수 있을까요."


하지만 남은 이들에겐 '수용'은 행정 절차가 아닌 '삶의 끝자락'으로 느껴진다. 이에 일부 주민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일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하나둘씩 '다음 삶'을 위한 준비를 도모하고 있다.

구룡마을 입구에 망루가 설치됐다. = 김주환 기자

 # 주민들이 원하는 건 결국 아파트 하나씩 공짜로 달라는 거예요. 여긴 강남이에요. 평당 1억, 25평이면 25억이에요. 그걸 공짜로 줄 수 있겠어요? - SH 용역 직원 D씨 


해당 재개발 관계자들은 '구룡마을 특혜 불가'라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일종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SH공사 관계자는 "구룡마을 예외를 인정하면 해운대나 광안리 등 다른 재개발 지역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라며 "때문에 주민들 요구가 현실적으로 적용되기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국토부 관계자 역시 "주거 취약지 재정착 문제는 중앙정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며 "법 개정 없인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라고 전했다. 

계절은 바뀌고 재개발 관련 행정 절차는 점차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그렇게 쉽게 옮겨지지 않는다. 구룡마을을 떠나는 사람만큼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 이야기도 기록될 이유다. 서울이 더 높고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그림자 아래 남겨진 사람들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다.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  
  •    
맨 위로

ⓒ 프라임경제(http://www.newsprime.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