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수송보국(輸送報國)=수송으로 조국에 보답한다.'
이는 한진그룹 경영 철학이자 조중훈 창업주의 신념이다. 지난 5일 조중훈 창업주가 탄생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한진그룹의 수송보국 경영철학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한진그룹의 수송보국이 국가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면서 국민의 기업으로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참된 기업가 정신을 요구하고 있어서다.
실제로 한진상사 창업으로 한진그룹의 태동을 시작한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보국 정신을 바탕으로 한 나라의 동맥인 수송사업을 발전시켜 국가경제를 발전시켰다.
특히 그가 수많은 업종 중 수송·물류를 택한 것은 국가에 헌신하기 위해서였다. 수송이 인체 혈관처럼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만큼, 수송으로 우리나라 산업화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은 "눈앞의 단기적 재무 실적에 치중하기 보다는 긴 호흡으로 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제의 대동맥으로서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을 다해야 하는 물류 수송 산업의 본질적인 가치를 수송보국은 이야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조중훈 창업주의 수송보국 경영이념은 故조양호 회장을 거쳐 지금의 조원태 회장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한진그룹의 핵심 DNA다. 이에 일평생 수송보국에 몸 바친 조중훈 창업주의 발자취를 살펴봤다.
◆고난 속 빛난 '신용'의 힘…땅에서 하늘로 사업 확장
그 시작은 트럭 한 대였다. 1945년 11월 조중훈 창업주는 앞서 1942년에 설립했었던 이연공업사(엔진 재생 전문 자동차 수리업체)를 정리할 때 받은 보상금과 저축해 둔 돈으로 트럭 한 대를 장만했다. 그리고 인천 해안동에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한진(韓進)은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의미를 새긴 것으로, 사업을 통해 우리 민족을 잘 살게 하겠다는 조중훈 창업주의 신념이 반영됐다.
신용을 사업가의 기본 소양으로 생각했던 조중훈 창업주는 한진상사를 시작 5년 만에 종업원 40여명·트럭 30여대를 보유한 회사로 성장시켰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회사 재산이 군수물자로 동원되면서 사업은 정리됐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그는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피난 때 몰고 갔던 트럭 한 대로 회사 재건에 몰두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에게 빛이 돼준 건 그가 그동안 쌓아왔던 신용이다. 그 신용 덕분에 투자자들에게 무담보로 대출을 받는 등 다시 재기에 성공한다.
재기에 성공한 한진상사는 1957년 자본금 1000만환의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1959년 소공동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열고, 1960년에는 한 해 외화 220만달러를 벌고, 500대의 보유차량을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1973년 보잉 747점보기의 태평양 노선 취항식에서 조중훈(왼쪽 네 번째) 회장이 정재계 인사들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 ⓒ 한진그룹
한진상사를 중견기업으로 성장시킨 조중훈 창업주는 수송보국의 꿈을 하늘에서도 펼쳐 보겠다는 마음으로 4인승 세스나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으며, 주식회사 한국항공(Air Korea)를 설립했다.
그러나 정부에서 당시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전폭 지원함에 따라 한국항공이 경쟁력을 잃게 되자 대안으로 그는 주한미국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해 서울~인천 구간에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한진고속의 시초)을 시작했다.
또 1965년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으로서 경제시찰단 일원으로 동남아를 순방하던 때 베트남 퀴논항에 30여척의 화물선이 정박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사업을 떠올렸다.
그의 깨달음은 '한진상사가 퀴논항의 군수품을 하역하고 수송한다면 기회가 될 것'이다였고, 퀴논에 파병 중인 미군들을 설득한 끝에 790만달러의 군수물품수송계약 체결을 이끌어 냈다. 그때부터 한진상사는 종전인 1971년까지 총 1억5000만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당시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은 125~200달러 안팎.
◆축적한 경험·자금 바탕 육·해·공 종합 수송 그룹 성장
여기서 멈추지 않고 조중훈 창업주는 축적한 경험과 자금을 바탕으로 사업 범주를 크게 확장시켰다. 특히 설립하거나 인수한 회사들은 대부분 수송과 직접적 관련이 있거나 이를 보조할 수 있는 기업들이었다.
구체적으로 1967년 자본금 2억원으로 해운업 진출을 위해 대진해운을 창립, 그 해 베트남에 투입된 인원과 하역장비, 차량, 선박 등에 대한 막대한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양화재해상보험 주식회사도 인수했다. 또 1968년 한국공항·한일개발을 설립하고, 인하공대를 인수했다. 1969년에는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을 설립하며, 항공사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조중훈 창업주 탄생 100주년 추모행사. ⓒ 한진그룹
나아가 조중훈 창업주의 발길은 바닷길로 향했다. 1977년 육·해·공 종합 수송 그룹의 완성을 위해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했다.
당시 한진해운은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로 늘어나는 해운 수요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고, 1987년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선주를 인수 및 합병해 생산성 제고를 토대로 인수 2년 만에 경영정상화를 이뤄냈다.
이외에도 그는 한진해운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조선업으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한진해운의 규모가 커지면서 화물선 수요가 꾸준히 늘었고, 보유 선박 수리 물량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당시 법정관리 절차를 밟고 있던 조선공사 매각입찰에 참가해서 인수 후 1989년 한진중공업을 출범시켰다.
◆사재 털어가며 인재양성…기업의 사회적 역할 충실
이외에도 조중훈 창업주는 기업이 사회복지 증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취지에서 인하학원을 인수(1968년)하고, 한국항공대학교를 인수(1979년)하며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정석고등학교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돌산을 깎아 교사를 건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1988년부터는 가정 형편상 대학진학의 기회를 갖지 못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국내 최초의 사내 산업대학인 한진산업대학(現 정석대학)을 개설해 직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줬다. 그리고 이 같은 조중훈 창업주의 교육열은 현재까지도 한진그룹의 교육공헌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진그룹은 "조중훈 창업주는 '죽을 때 동전 두 닢 갖고 가는데 다 쓰고 가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의미가 있는 곳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며 "사재를 털어가며 아낌없는 투자를 했음에도 '칭찬을 받자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그런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육영사업에 기울인 정성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조중훈 창업주는 생전에 모은 사재 가운데 1000억여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기부한 것은 물론, 그 중 500억원은 수송·물류연구발전과 육영사업기금으로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 총 세 곳에 배분했다.
이외에도 조중훈 창업주는 평소 "사업은 예술과 같다"고 생각했다. 한 예술가의 혼과 철학이 담긴 창작품이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듯, 경영자의 독창적 경륜을 바탕으로 발전한 기업 역시 오랫동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술가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기업가도 예술가의 신념과 노력으로 사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 조중훈 창업주는 기업은 반드시 '국민 경제와의 조화'라는 거시적 안목에서 운영해야 하며, 눈앞의 이익 보다는 국익을 위해 기업이 일정 부분의 손해도 부담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