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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하승철 경상남도 서부권지역본부장

"개발보다 근본적 가치 고민, 비전과 가치 실현"

서경수 기자 | kkw4959@hanmail.net | 2018.01.22 17:34:46

하승철 경남도 서부권지역본부장. ⓒ 프라임경제

[프라임경제] 하승철 서부권지역본부장의 20여년 공직생활 경험과 진주부시장, 경남도청 시절의 숙련된 행정력 등 진주시와 경상남도의 미래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공무원이 된 배경은.

▲지금 생각해보면 공직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별다른 재주가 없이 태어난 제가 공동체의 평화와 공존번영을 도모하는 일에 묵묵히 노력하는 것 외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다.

농사에 실력을 보이지 못했던 아버지는 약종상시험에 응시해 하동 옥종의 시골마을에서 약방을 하셨는데 살림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시 약값은 추수 후 '연말에 회계'하는 것이 관행이었고 수년째 못 받다가 결국 돈을 떼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아버지는 남명선생의 유교철학에 관심도 많으셨는데, 이는 남명의 수제자였던 각재 하항(河沆)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살아오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나 사회의 정의와 형평에 대한 나의 관심은 선친의 영향이 매우 컸다. 막상 행정학과에 입학한 후 공직이 주는 핫 하지 못한 이미지 때문에 망설였지만 그렇게 형성된 관심과 사고방식이 결국 서른이 넘어 공직에 도전하게 됐다.

-초임공무원으로서 기억은.

▲1997년 사무관으로 임용돼 1년 연수를 마치고 1998년 진주시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 IMF 구제금융이 시작됐던 시기라 도처에 기업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쏟아졌다.

실업대책상황실장이라는 이름으로 실업정책을 수행했다. 정부에서도 처음해보는 실업행정이라 수 십가지 사업들이 내려왔다. 비효율적인 사업과 중복된 정책들을 현장에서 바로 잡고, 한 명의 일자리라도 더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998년 여름 진주시 강남동장으로 첫 공식보직을 받았다. 총각동장이 왔다는 소식에 강남동 망경동 주약동 주민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적극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고, 직원들의 하나 된 노력 덕분에 큰 실수 없이 소임을 마쳤다.

또 행정이 주민생활에 전달되는 현장 책임자로서의 경험은 천만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귀한 경험이다. 독거노인에 대한 관심, 지역공동체의 중심으로서 주민자치의 가능성도 체감했다.

봉사활동 하러 온 학생들과 망경북동 월세 3만원짜리 방에서 혼자사는 할머니들 생신축가를 불러주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통장 반장을 통해 정책이 전달되고 주민의사가 행정에 반영되는 등 각종 사회단체의 열정적 봉사는 선진국에서도 볼 수 없는 대한민국 행정만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동사무소 2층대회의실을 자주 쓰지 않는 것을 보고, 청소년을 위한 겨울 영화교실을 기획했다. 시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스티로폼을 이어붙이고 흰 페인트칠로 스크린을 만들고 합판으로 관람석도 만들었다.

이어 매주 수요일 저녁에 '아름다운 비행' 등의 감동적인 영화를 상영했다. 입장권은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직접 만들어 무료로 문방구 등에 배분했는데 수요일 밤마다 2층 회의실이 꽉꽉 차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는 정보화의 바람이 막 불 때였다. 통신프로토콜 프로그램과 홈페이지 제작 프로그램을 직접 배워 강남동사무소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경상남도에서는 처음 만들어지는 동사무소 홈페이지라 서울 강남주민들이 강남구청 홈페이지인줄 알고 게시판에 민원을 잔뜩 올리기도 했던 기억들이 난다.

-진주부시장 시절 기억에 남는 일들은.

▲항공·나노·해양플랜트 국가산단 유치성공을 인정받아, 진주부시장으로 임명된 것은 2014년 12월, 15년만에 공직생활을 출발했던 곳에 부단체장으로 귀향한 것은 매우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매우 어렵고 아픈 삶을 힘겹게 넘기고 있었다. 사사로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삼가 한 채 밤낮으로 업무에만 매달렸다. 지금 생각하면 동료직원들과 즐거운 마음을 나누지 못해 많이 후회스럽다. 36만 진주시민의 삶을 책임지는 행정실무 총지휘자로서의 책무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하동부군수 시절 얻었던 농정·산림에 대한 경험과 경남도 도시국장시절 쌓았던 도시계획·신도시, 개발·공단건설에 관한 다양한 정책사례, 경제통상본부장으로서 기업유치와 미래산업육성 및 해외통상업무 경험으로 진주시정을 살피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이에 따라 15%에 가까운 이월예산을 크게 줄여 행정낭비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던 일은 동료직원들의 행정문화와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문제라 힘든 점이 많았지만 결국 성과를 냈었다.

남강유등축제는 성과도 있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유료화가 결정된 상황에서 문제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축제기간 중 셔틀버스 전용차로를 확보해 교통체증 문제를 해소한 것은 다행이지만, 킬러컨텐츠 구축이나, 산업과 예술을 연계하는 '유등연구소 설립' 제안은 수용되지 못했다.

또 경남도 생물산업팀장 시절 직접 진주 문산 일대에 클러스터를 조성하기 위해 1000억원이 넘는 국·도비를 확보하고, 진주와 경남의 미래성장동력으로 키우려 했지만 바이오산업을 크게 꽃피우지 못해 부시장으로서 무척 안타까웠다.

하지만 사업제안단계의 부실로 인해 탈락직전이었던 옥봉동 '새뜰마을' 사업유치는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옥봉동 구석구석을 살피고 경남도 도시국장시절의 도시재생사업 경험을 살려 결국 중앙부처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경남도 도시국장시절 유치했던 상평공단재생사업은 부시장이 돼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나의 비전과 대안들을 반영할 수 없어 무척 안타까웠다.

△준공업지구의 정돈 △사양산업 정리와 첨단연구단지 전환 △컨벤션 센터와 국제금융비즈니스 타운 △강변을 살린 상업문화 공원시설 확보 △가좌동 신역세권과 연결하는 새로운 다리 등은 상평공단전체를 혁신하고 도시와 구 시가지를 연결하는 점에서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다.

-경남도청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나, 아쉬웠던 점은.

▲진주 강남동장 시절 정보화에 밝다는 소문이 도에까지 나면서 김혁규 도지사의 지시로 전격 경남도청으로 전입됐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니 정책개발분석팀장을 맡아 전세계를 누비며 좋은 시책을 발굴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일본과 캐나다 미국 유럽 등의 공공기관과 자치단체 홈페이지를 뒤져가며 얻은 정책 아이디어는 이후 100여개가 넘는 나만의 정책파일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당시 일본 후생성에서 시도하던 간호보험제도를 한국실정에 변용해서 적용해보는 안을 제시했고, 세계자전거 축구대회와 이색자전거 대회, 에너지 절약레이스, 첨단기업참여형 유기농밸리 등을 정책화했다.

도청에서의 두 번째 보직이었던 생물산업팀장은 모든 역량을 소신껏 발휘했던 보람된 시간이었다. 김해-진주-부산을 잇는 의생명-농생명-해양생명 바이오트라앵글 전략을 직접 제시해 경남도의 정책 아젠다가 되기도 했다.

진주시 문산읍에 조성된 바이오21센터를 더욱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바이오클러스터를 조성 계획을 세우고, 매년 30억씩 지원하는 생명공학산업화과제 발굴, 바이오 전용공단 조성, 투자자금이 필요한 바이오 기업을 위해 규약을 만들고 은행을 찾아다니며 100억원의 바이오 펀드 자금을 조성했다.

또 정부사업에 경남 바이오산업을 반영하기 위해 전문가들과 밤낮을 세워가며 전략을 짰고, 정부와 도지사의 판단변경으로 바이오산업이 탈락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청와대까지 찾아가 예산을 확보했다. 지금 생각해도 내 공직인생의 선명한 추억으로 남는다.

이에 따라 진주의 생물산업은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지역혁신모범사례로 책자에 수록되기도 했지만, 내가 보직을 이동한 후 경남도의 전략산업에서도 제외되면서 진주시에서도 푸대접을 받은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그 외에도 경남발전로드맵을 총괄하면서 수백가지의 정책들과 남해안발전특별법 국회통과와 남해안발전전략을 기획하고, 전남동부와 경남서부해안지대에 동서통합지대 사업을 제안해 국책사업으로 추진됐다.

서부권지역본부장 보임 직전인 재난안전건설본부장 시절에는 SOC신규 창출억제라는 정부정책에 돌파구를 마련하고, SOC의 양보다는 품질을 높여 사람의 안전을 높이는 사업들을 펼치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던 일도 보람된 일이었다.

-경남도의회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들은.

▲경남도 의회에서 2급 이사관인 사무처장직을 수행한 것은 공직생활의 독특한 경험이었다. 합리성 합법성에 부합되는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일에 익숙했던 나는 50명이 넘는 도의원들의 지역갈등과 의견을 수렴해 보다 효율적으로 지원했다.

또 의회의 견제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예산관련 조직을 늘리고 정책활동의 지원을 강화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의원들을 공정하게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의회사무처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의회사무처장의 경험은 삶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지혜를 넓혀 준 소중한 기회였다.

-서부대개발 사업이 제자리걸음인데요. 속도를 낼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

▲서부권지역본부에서 추진하는 서부대개발 핵심사업은 △남부내륙철도 조기 건설 △항공국가산단 조성 및 항공 MRO사업 △해안권 발전거점 조성 △폐조선소 관광명소화 △항노화 사업 △혁신도시 시즌 2 △6차 산업 활성화 및 첨단 농업기반 강화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산업구조의 재편이나 정부의 기본정책변경 등 중‧장기 추진사업이 많아서 당장 결실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지난해 항공국가산단 승인과 최근 항공 MRO사업 승인 등 점차 사업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어 △항노화 주식회사와 동의보감 탕전원 운영 △남부내륙철도 민자 적격성조사 개시 △서부일반산업단지가 승인 돼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또 서부경남 10개 시군과 함께 서부경남 도민들의 의지를 모아 남부내륙철도 건설, 혁신도시 시즌 2, 항노화 산업 등 핵심전략산업들도 가시화해 나갈 계획이다.

아울러 지리산과 섬진강, 남해안 등 쾌적한 자연환경과 선비문화 등 유구한 역사 유적 등 이점을 살려 남해안권과 내륙권 관광활성화하고, 지역의 특색과 장점을 살린 농수산업을 육성해 첨단산업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경남도민들이나 진주시민들에게 한 말씀 한다면.

▲먼저 서부대개발 기존 계획과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하면서도 그 효과와 방향에 대해 시간을 갖고 정밀하게 되짚어 보겠다.

기존 계획의 논리는 서부경남은 동부경남이 실현한 30년 발전을 15년 내에 압축성장을 통해 낙후지역을 벗어나겠다는 취지인 듯하다. 물론 좋은 일이고 반드시 실행 돼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개발이라는 말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부대개발이라는 용어도, 동부연안권중심의 불균형발전전략을 취한 등소평과는 달리 시진핑 현 지도자가 50년을 내다보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서부를 개발하고 창조하겠다는 중국의 전략을 비판의식 없이 차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개발만이 최고'라는 과거의 패러다임에 갇히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물론 당연히 빨리 동부경남을 따라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주와 서부경남은 개발을 넘어 경남도민과 대한민국 국민들이 '와서 살고 싶은 도시, 기업하고 싶은 도시, 뿌리 내리고 싶은 도시'를 구축해 풍족한 삶의 질을 누릴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진주와 서부경남은 당연히 그럴 자격과 경쟁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인프라 중심의 하드웨어 개발과 장착에 그치지 말고, 역사·문화와 지역정체성을 바탕으로한 소프트한 개발, 환경과 자연을 생각한 개발이야 말로 주민들이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발을 넘어선 보다 근본적인 가치를 고민해야 하고 이것은 서부권지역본부가 해야할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비전과 가치는 실현 가능하다고 본다.

서부권중심에 진주가 있기 때문이다. 진주는 1000년을 이어온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주체적 저항의식 등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정신문화의 컨텐츠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프트한 개발, 삶의 질이 높아지는 개발, 창의적 지역문화를 만들어 내는 개발이 가능한 곳이다. 시민과 서부경남도민들께서도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저희 서부권지역본부와 함께 힘을 모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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