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최근 주한 러시아 대사관 외벽에 러시아어로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쓰인 대형 현수막이 내걸려 논란이 일고 있다.
침략 전쟁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주년을 기념한다는 구소련의 선전 문구가, 과거 구소련의 사주와 지원으로 시작된 6.25 전쟁의 희생을 치르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내걸린 것은 의도적인 조롱이라는 지적이다.
한술 더 떠 주한 러시아 대사가 국내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북한군의 위대함을 잊지 않겠다", "(북한과의) 관계가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섰다"라며 대놓고 북한을 추켜세웠음에도 정부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 공공연하게 조롱당하는 현상이 북한, 중국, 러시아의 눈치만 보며 당당한 주권 외교를 펼치지 못한 '굴종 외교'가 자초한 결과라고 비난한다.
심지어 조선 말 우리 땅을 제집처럼 짓밟으며 주권을 농락하고 왕까지 피신하게 했던 치욕적인 '아관파천'까지 거론하며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아무리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리한 비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부가 조속히 나서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즉각적인 시정 조치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루빨리 북·중·러의 호구가 되어버린 '굴종 외교'에서 벗어나 당당한 '주권 외교' 원칙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논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와 관련하여 김기현 의원까지 나서 SNS를 통해 동일한 주장을 내세우며 비난하는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경륜 있는 정치 지도자마저 편협한 이념에 사로잡혀 감정적 수사(修辭)에만 치우친 채 국제법과 외교 관례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외교 공관은 국제 협약에 의해 보호받는 공간이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대한민국 영토 안에 존재하지만, 그 운영과 관리에 있어서는 '1961년 비엔나 외교관계 협약(Vienna Convention on Diplomatic Relations)'의 적용을 받는다.
이 협약에 따르면 외교 공관은 본국의 영토와 유사한 지위를 향유하며 '불가침(inviolability) 원칙'이 적용된다. 또한 접수국(주재국)은 공관의 내부 문제나 표현물에 대해 직접적으로 규제하거나 강제 조치를 취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대사관 외벽에 게시된 문구가 외교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판단될 경우 절차와 관례에 따라 유감 표명이나 초치(招致) 등의 합법적 대응을 할 수는 있으나, 이를 국내법적 잣대로 "규제하라"거나 "철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제 협약의 틀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외교 문제를 감정적으로 처리할 경우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우리 재외 공관 역시 동일한 위험 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사관은 흔히 '치외법권' 지역으로 불린다. 정확히 말하면 주권이 완전히 이전된 영토는 아닐지라도, 본국의 영지와 동일하게 간주되어 외교적 면책과 불가침이 보장되는 공간이다. 이는 국제 외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지 특정 국가에 대한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외교 공관의 표현을 이유로 정부가 물리적 개입을 감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국제 관행을 벗어난 과도한 조치로 비쳐 국격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크다.
국제 정세를 단순한 선악 구도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가치 판단과는 별개로, 대한민국은 다양한 국가와 외교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중견 무역 국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는 감정이 아니라 국익의 문제이며, 전략적 균형과 현실적 인식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일부의 주장처럼 특정 외교 현안을 즉각 "굴종 외교"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념적 프레임에 의존한 해석이다. 외교적 대응에는 공개적 항의 외에도 비공개 협의나 외교 채널을 통한 유감 표명 등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모든 대응이 언론에 자극적으로 노출되어야만 '당당한 외교'인 것은 아니다.
외교 문제를 국내 정치적 공세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오히려 대한민국의 외교적 신뢰성을 약화시킨다. 대한민국은 주권 국가로서 국제 규범을 존중하는 모범적인 외교 국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답게 국제법의 틀 안에서 냉철하게 대응하는 것이 진정으로 국격을 지키는 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사관은 국제 협약상 불가침이 보장되는 공간이다. 정부에 직접적인 규제를 요구하는 것은 국제법상 현실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 신뢰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길 수 있다. 외교는 감정적 대응이 아닌 전략적 판단의 영역이다. 이번 상황을 '굴종 외교'로 단정하는 편협한 이념적 해석을 경계하며, 국민들 또한 이 사안을 국제법과 외교 관례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규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