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요즘 같은 분위기라면 차라리 힘 있는 관(官) 출신이 내려오는 게 든든하죠."
최근 금융권의 차기 수장 선임 절차가 한창이던 때, 한 관계자가 심정을 털어놓은 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낙하산 인사'라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민간 금융사의 정서가 180도 달라졌다.
이는 단순히 특정 인물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금융권이 처한 척박한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민간 금융사가 자율성을 포기하면서까지 관에 기대려는 배경에는 '불확실성'이라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금융사고는 물론 포용금융·생산적금융 등 금융당국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사 입장에서는 당국의 의중을 정확히 읽고 거친 외풍을 막아줄 방패막이가 그 어떤 경영 전략보다 시급한 셈이다.
그런데 민간이 방패 아래로 숨어들려고 하는 사이, 정작 정부의 입김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던 국책은행에서는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오히려 관료 출신을 배제하고 실무에 능통한 내부 출신 인사가 수장 자리를 꿰차는 사례가 늘고 있어서다.
최근 IBK기업은행은 장민영 전 IBK자산운용 대표가 은행장을 맡게 됐다. 김성태 전 행장에 이어 두 번 연속 내부 출신이 지휘봉을 잡았다. 역사적으로는 여섯 번째 내부 출신 기업은행장이다.
수출입은행장 역시 윤희성 전 행장에 이어 황기연 행장이 바통을 받으며 두 차례 연속 내부 출신 인사가 수장을 맡고 있다. 관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산업은행 회장직도 변화의 흐름에 합류했다. 1954년 설립 이래 처음으로 내부 출신인 박상진 회장이 취임하면서다.
이러한 변화는 국책은행의 역할이 과거 단순한 자금 공급을 넘어 복잡다단한 구조조정과 정책펀드 운용 등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영역으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외부 인사보다는 조직을 꿰뚫고 있는 내부 리더가 정책 효율성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지금의 현상은 민간과 국책은행이 각자도생을 위해 선택한 최적의 생존 전략이다. 민간은 대관 능력을, 국책은행은 전문성을 택했다.
하지만 이 역설적인 풍경이 남기는 뒷맛은 개운치 않다. 국책은행이 전문성을 무기로 진화하는 것과 달리, 혁신의 주체가 되어야 할 민간 금융사는 힘 있는 인사를 통해 안정을 도모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기류는 분명 퇴보에 가깝다.
관 출신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금융 생태계에서 과연 진정한 의미의 혁신과 자율경영이 뿌리내릴 수 있을지 곰곰이 되짚어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