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로봇이 스스로 판단하는 시대를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논의는 여전히 알고리즘과 클라우드에 머문다. 더 정교한 모델, 더 빠른 연산, 더 큰 서버가 해답이라는 접근이다.
그러나 현대자동차(005380)와 기아(000270)는 이번 CES에서 로봇 AI를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 제시했다. 핵심은 AI의 성능이 아니라 네트워크가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판단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였다.
현대차·기아가 공개한 온-디바이스(On-Device) 기반 로봇 AI 칩 개발 완료 소식은 기술 성과라기보다 방향 전환에 가깝다. AI를 멀리 있는 서버가 아니라 로봇 자체에 탑재하겠다는 선택은, 로봇을 연결된 기기가 아니라 독립적인 판단 주체로 보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로봇이 실제 공간에서 한계를 드러낸 이유는 명확하다. 병원, 공항, 물류센터처럼 복잡한 환경에서는 네트워크 지연과 통신 불안정이 곧바로 오작동으로 이어진다. 클라우드 AI는 계산 능력은 뛰어나지만, 현장에서는 늘 한 박자 늦다.
현대차·기아가 선택한 온-디바이스 AI 구조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로봇이 센서를 통해 인식한 정보를 외부로 보내지 않고, 스스로 처리하고 판단하는 방식이다.
네트워크 환경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에, 지하주차장이나 통신 음영 지역에서도 동일한 수준의 반응을 유지할 수 있다. 속도와 보안이 동시에 필요한 공간에서 이 구조는 선택이 아니라 전제 조건에 가깝다.
이번 발표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이 기술이 더 이상 개념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대차·기아 로보틱스랩은 지난 2024년부터 서울 성수동 팩토리얼 성수에서 안면인식과 배송 기능을 수행하는 로봇을 실제 운영 환경에 투입해 왔다.
이 실증 과정은 기술 데모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공간에서 로봇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작동하는지, 예외 상황에서 판단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지를 검증하는 과정이었다.
즉, 이번 AI 칩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수준을 넘어 이미 쓰이고 있는 기술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단계에 들어섰다.
현대차·기아 로보틱스랩이 강조한 '공간의 로봇화'는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풀어보면 단순하다. 로봇 한 대를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자연스럽게 작동할 수 있도록 공간 자체를 다시 설계하겠다는 접근이다.
이 전략에서 온-디바이스 AI 칩은 핵심 인프라다. 로봇이 외부 연결에 의존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공간 전체를 하나의 로봇 시스템처럼 운용할 수 있어서다. 병원이나 호텔처럼 안전과 신뢰가 중요한 장소일수록, 이 구조의 의미는 더 커진다.
이번 협업이 흥미로운 지점은 AI 반도체 전문기업 딥엑스(DEEPX)와의 관계 설정에 있다. 현대차·기아는 단순히 외부 기술을 사다 쓰는 방식이 아니라 로봇에 최적화된 칩을 함께 설계했다. 이는 성능만이 아니라 비용, 공급 안정성, 양산 가능성까지 고려한 선택이다.
이 지점에서 자동차 산업의 경험이 힘을 발휘한다. 수십 년간 축적해온 대량 생산과 품질 관리, 공급망 운영 노하우는 로봇 산업에서는 아직 드문 자산이다. AI 기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결국 승부는 '얼마나 잘 만들 수 있는가'보다 '얼마나 안정적으로 계속 공급할 수 있는가'로 이동한다.
현대차·기아가 이번에 공개한 것은 하나의 칩이 아니다. 로봇이 실제 사회 인프라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어디에서부터 쌓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피지컬(Physical) AI의 경쟁은 모델 성능 비교로 끝나지 않는다. 전력 효율, 현장 안정성, 장기 운용 가능성 같은 요소들이 뒤늦게 중요해지는 순간, 이 싸움은 전혀 다른 판이 된다. 현대차·기아는 그 전장을 미리 보고, 가장 아래쪽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AI가 현실 세계에 내려오는 길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다. 다만 끊기지 않고, 멈추지 않고, 조용히 작동해야 한다. 이번 CES 2026에서 현대차·기아가 보여준 선택은 그 현실적인 방향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현동진 현대차·기아 로보틱스랩장(상무)은 "현대차·기아 로보틱스랩은 단순히 로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로봇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며 "피지컬 AI 파이프라인의 마지막 접점에서 사용자가 실제로 경험하는 가치를 창출하고 저전력으로 움직이면서도 효율적이고 스마트한 로봇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