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만나면 5년, 다시 만나도 5년."
2025년 한 해 동안 국내 액셀러레이터(AC) 업계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단골로 등장하던 건배사다. 초기 창업 기업의 기준을 3년으로 묶어둔 낡은 규제가 투자 현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절박함이 담긴 외침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업계를 짓눌렀던 이 간절한 목소리는 이제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됐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4대 벤처 강국 도약 종합대책'은 AC의 투자 지평을 5년으로 대폭 넓히며 업계의 새로운 서막을 알렸다.
◆'고사 위기' 상반기 견디니 찾아온 '반전의 12월'
돌이켜보면 2025년은 잔인한 한 해였다. 고금리 기조가 유지되면서 벤처 투자 시장은 유례없는 '혹한기'를 보냈다. 특히 초기 투자를 담당하는 AC들은 자금 모집(Fundraising)의 어려움과 포트폴리오사들의 실적 악화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유망한 기업을 발굴해도 법적인 '3년 규제'에 막혀 후속 투자를 집행하지 못하고 VC(벤처캐피탈)로 주도권을 넘겨야 하는 상황은 AC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핵심 요인이었다.
하지만 연말에 발표된 이번 대책은 그간의 침체 분위기를 단숨에 반전시켰다. 단순히 수치상의 완화가 아니라, AC의 정체성을 '초기 투자자'에서 '성장 파트너'로 재정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 '3년'의 벽 허문 AC, 스타트업 '데스밸리' 구원투수 자처
이번 대책의 가장 큰 성과는 주목적 투자 의무 대상의 확대다. 기존 3년 이내 기업에 국한됐던 AC의 투자가 5년 차 기업까지 가능해졌다. 스타트업이 가장 큰 자금난을 겪는 이른바 '데스밸리(4~5년 차)' 구간에 AC의 전문적인 자금이 수혈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전화성 초기투자액셀러레이터협회장은 "현장에서 '해방감'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의 중대한 변화"라고 평가했다. 전 회장은 "초기 기업은 통상 3년 안에 성과가 가시화되기 어렵지만, 그동안 AC는 제도적 제약으로 장기적인 관점의 투자와 보육에 한계가 있었다"며 "이제 AC는 보다 책임 있게 기업의 성장을 끝까지 동행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이는 단기 성과 위주의 투자 관행을 개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데이터 생산자' 위상 강화 '벤처 스튜디오'로 종합 투자기관 도약
투자 형태의 진화도 눈에 띈다. 그간 법적 회색지대에 머물며 '행위 제한'의 공포를 안겨줬던 '벤처 스튜디오' 모델이 공식화됐다. AC가 자회사를 만들어 직접 기술과 시장을 검증하고 사업을 키우는 '컴퍼니 빌딩'이 합법화된 것이다. 여기에 창업 투자 데이터 관리 주체가 민간 협회로 이관되는 점은 AC의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상징적 조치다.
전 회장은 데이터 이관에 대해 "액셀러레이터를 단순한 보육기관이 아니라, 초기투자 시장의 실질적 '데이터 생산자'로 공식 인정한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벤처 스튜디오의 제도권 편입까지 더해지면서 AC는 발굴–검증–투자–후속연계까지 아우르는 '종합 초기투자 기관'으로 위상이 격상됐다"며 "이는 AC가 스타트업 생태계의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 인프라라는 점을 분명히 한 변화"라고 설명했다.
◆ '회수 시장' 물꼬 "시행령에서 제도 취지 좁아지지 말아야"
고질적인 문제로 지목됐던 '회수(Exit)' 시장에도 물꼬가 트인다. 2030년까지 세컨더리 펀드 규모의 20%를 AC의 구주 매입에 할당하는 특례가 추진된다. 투자-회수-재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의 가장 약한 고리였던 구주 매각의 길이 열리면서 업계 전반의 자금 유동성에 숨통이 트일 전망이다.
다만 업계는 이번 대책의 '디테일'이 결정될 시행령 단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 회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의 취지가 시행령 단계에서 다시 좁아지지 않는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투자 범위 확대, 벤처 스튜디오 운영 등과 관련해 과도한 예외 규정이나 추가 제한이 붙지 않아야 정책 효과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2025년은 대한민국 액셀러레이터가 단순한 '조력자'의 꼬리표를 떼고 벤처 생태계를 주도적으로 설계하는 '주연'으로 거듭난 원년으로 기록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