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황진이' 영화만 물경 12편, 드라마 9편 그리고 오페라, 뮤지컬, 연극이 만들어지는 등. 우리 역사 기록의 여인 중 이렇게나 많이 엔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여인이 있을까.
특히 한국산 오페라의 첫 뉴욕 무대 등장도 이 여인의 것이었다. 지난 1991년 대본 완성 후 장장 8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과 풍류를 작품에 골고루 펼쳤던 '창작오페라 황진이'가 그것.
우리에게 알려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인은 황진이(1501~1562)가 틀림없다. 신사임당같이 5만원권 삽입 인물은 되지 못했지만, 명성 황후와 같이 지체 높으신 비운의 왕비도 아니었지만, 남성 우월 시대에 대항하고 신분과 계급과 싸우며 여성성을 한껏 발현하는 삶을 산 여인. 이 여인도 여인이라 왜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 적이 없겠는가.
이번 호는 이 여인이 헤어져 보고파 죽고팠던 한 남성에게 보낸 詩 편지가 500여 년 만에
음률에 입혀져 노래 된 사연이다.
◆ 딱 30일만 같이 살자
때는 조선 중종 재위 시절, 나이 28세쯤에 황진이는 자기와 딱 한 달 30일만 살자는 제안을 받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대제학 벼슬을 가졌었고, 20살 정도가 많으며, 조선의 도연명으로 칭송받던 소세양(1486~1562), 지금 같으면 교육부총리급이다.
황진이는 학식이 풍부한 사람과 풍류를 즐기며 사귀는 걸 좋아했는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제학 소세양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소세양은 그 당시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개성에 은거하고 있었다. 동거를 시작하기 전 둘은 많은 편지를 주고받다가 합의에 이르렀고 드디어 해가 뜨고 지는 30일만 함께하기로 약조했다.
소세양이 편지로 기생의 삶은 덧없으니, 불교나 유학 공부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자, 황진이는 모든 삶은 덧없다는 시를 지어 보냈는데, 소세양이 그 글에 크게 감동해 30일 살이를 제안했다고 전해온다.
소세양은 친구들에게 "황진이가 아무리 절세미인이라도 30일 만나고 말 것이다. 그 후에도 내가 황진이를 그리워하거나 만난다면 사람이 아니다" 라고 큰소리를 쳤다.
헤어지자 그는 조정의 부름으로 한양으로 복귀했고, 복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진이의 몸종으로부터 소야월곡이란 시 편지 한 장을 받는다. 그 편지가 시 노래 원문이다.
이 편지를 읽은 소세양은 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며 황진이를 다시 찾았다는 얘기가 개성별곡에 실려있다. 이 얘기는 개성 명월관에서 나와 기록되었으리라 추정한다. 청백리로 학식이 높았던 소세양은 후에 논산으로 내려가 퇴거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76세까지 살았다.
◆ 기생이 된 사연
그녀의 아버지는 황 진사로 어느 날 개성 근처 다리 위에서 냇가에 빨래하는 여인을 보았다.진 씨성을 가진 이 여인은 멀리서 보아도 미색이 예사롭지 않아 가까이 다가가 마음을 얻어 첩으로 들어앉았고, 그렇게 태어난 여인이 황진이였다.
황진이는 어려서부터 자색과 총명을 겸비해 사서삼경은 물론 한학과 시조에 능통했다. 그러던 황진이가 15~6세쯤에 옆집에 사는 한 청년이 죽었다. 이 청년은 황진이를 흠모하다 상사병으로 죽게 됐는데, 청년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을 지나면서 멈춰서 움직이질 않았다.
그때 황진이가 나와 저고리를 벗어주고 덮어 주며 쓰다듬으니 그제야 상여가 나갈 수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자책한 황진이는 모든 남성의 노리개로 자신을 내어주기로 결심하고 기생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의 가설도 있다.
반쪽 양반이었던 황진이는 명문가의 정실이 될 수 없었기에 세상의 모든 남성을 희롱하기로 작정하고 기적에 발을 들였다는 야사가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활달한 성격에 학문 또한 깊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 황진이가 가정의 울타리에 갇혀 강요된 규범에 순응하며 평범한 여인네로 살기는 애당초 불가능했으리라.
조선의 기생들은 노류장화(路柳墻花). 즉 길가의 버들가지나 담장에 있는 꽃처럼 마음만 먹으면 쉬이 꺾을 수 있는 꽃으로 여겼다. 하지만 황진이만큼은 어림없었다. 그녀의 환심을 얻기 위해 큰돈을 뿌려대고 권세를 앞세워 흔들어 봐도 곁눈조차 주는 법이 없었다.
풍류나 예술을 모르는 이들은 상종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조선의 명망가들은 애가 달아 너나없이 그녀를 한 번 품어보려는 헛된 욕망으로 불나방처럼 모여들었다.
기생은 해어화(解語花)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궁녀들과 연꽃을 구경하던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의 미모에 취해 연꽃보다 아름답고, 말귀를 알아듣는 꽃이라 칭한 데서 비롯된다.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도 맨 꼭대기 상류층 양반은 물론이고 제왕과 왕족까지 질펀하게 희롱하고 능멸했던 예인 집단 기생은 천민이었지만 계급 질서에서 벗어난 번외인들이었다.
여성은 차례대로 아버지, 남편,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와 한 남편만을 섬겨야 한다는 일부종사로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던 시절에 물리를 터득한 황진이가 그런 사회를 옹골지게 순응하며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의 멸시에도 불구하고 한 번뿐인 인생을 마음 가는 대로 산화시키길 원했던 강렬한 양가적 욕망이 조선 기생들의 숙명이었다. 보헤미안의 집시들처럼 카르멘처럼, 조선의 기생들 역시 그렇게 불꽃으로 타올랐다. 역사의 뒤안길로 가뭇없이 쓰러져간 한 날의 봄꿈들이었으리라. 다음 호는 황진이의 소야월곡이 번역되어 음률이 입혀진 데도 사연이 있어 소개한다.
이상철 위드컨설팅 회장/칼럼니스트·시인·대지문학동인/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회장(前)/국회 환노위 정책자문위원/ 국회의원 보좌관(대구)/ 쌍용그룹 홍보실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