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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감시와 억압을 넘어선 헌신 '독립운동가 의친왕'

이종엽 발행인 기자  2025.08.18 1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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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2025년 8월15일은 광복 80년이라는 의미 있는 날이다. 하지만 잊혀진 이름인 광무황제의 차남 의친왕(義親王 李堈, 1877~1955년) 승하 70년이라는 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역사를 전공한 필자는 지난 1999년 부터 우리 역사, 정확히 말하자면 대한제국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온오프라인을 통해 활동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마음에 큰 빚만 지닌 채 애써 외면해 왔었다.

필자는 '일제 강점기'라는 표현 보다 '항일 투쟁기'라는 말을 지금까지 써 왔다.  만 34년 11개월 기간의 정의와 주체를 다르게 표현한 셈인데,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미래 정당성이 부여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대한제국'은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 정체성에 대한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다가올 미래에도 다른 의미로 와 닿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의친왕'이다.

의친왕은 광무황제의 차남이자 오늘날까지도 왜곡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로 생애를 '일제'와 '독립운동'이라는 키워드에 갇혀 있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매도하며, 단지 일본의 감시망 아래 무력한 존재로만 기억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억지일 뿐, 오히려 의친왕의 숨은 헌신과 투쟁을 철저히 무시하는 몰역사적 태도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의친왕은 황실이라는 족쇄 속에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으나, 그 제약 속에서도 민족 독립을 위한 다양한 지원과 접촉을 통해 명백히 독립운동을 실천했다.

1919년 3·1운동 전후해 황실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세력이 고개를 들었고, 그 중심에 의친왕이 있었다. 대표적인 거사가 바로 '대동단 사건'이다. 대동단은 국내 독립운동 단체와 해외 임시정부 세력을 연결하려는 비밀결사였고, 의친왕은 그 조직의 핵심적 인물로 지목됐다. 

일제는 이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며 의친왕을 감시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는 곧 그의 움직임이 독립운동에 직결돼 있었음을 반증한다. 만약 그가 단순히 무위도식하며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일제가 고위 황족을 집요하게 추적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더 나아가 의친왕은 여러 독립운동 단체와의 접촉을 유지하며 군자금을 제공했다. 그는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은밀히 재정적 지원을 보냈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청년 지사들을 비호했다. 이는 총칼을 들고 싸우는 직접 전투의 모습은 아니었을지라도, 독립운동의 대의를 뒷받침하는 실질적 행위였다. 

독립운동의 정의는 결코 단선적이지 않다. 군자금을 대는 것, 청년 지사를 보호하는 것, 조직을 지원하는 것 모두가 독립운동의 중요한 축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일부 평자는 이를 무시한 채, “드러난 확실한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독립운동가가 아니라고 치부한다. 

이는 독립운동을 총칼의 싸움으로만 협소하게 규정하는 무지이자, 수많은 후원자와 은밀한 활동가들의 공로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역사 모독이다. 의친왕의 운신 폭이 극도로 제한됐던 이유를 냉정히 봐야 한다. 

그는 대한제국 황족 출신의 핵심적 인물이었고, 일제는 그를 잠재적 저항 상징으로 여겨 극도로 경계했다. 그의 생활은 끊임없는 밀정과 헌병의 감시 속에 이뤄졌다. 매 순간 보고서가 작성됐으며, 그의 주변 인물들마저도 정보망에 얽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친왕이 직접 만세운동의 선두에 서거나 무장봉기를 주도할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립운동가들과 연결 고리를 유지했고, 음지에서 조력자이자 후원자의 길을 걸었다. 이는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시대의 굴레 속에서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간 참된 의미에서 '독립 핵심 인물'이다.

일각에서는 그가 일제에 협력했다는 허황된 주장까지 내놓는다. 그러나 이는 일제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왜곡된 시각일 뿐이다. 일제는 대한황실을 철저히 무력화시키고자 했으며, 황족들의 독립 지향적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반대로 ‘충성’의 이미지로 포장했다. 

따라서 그들의 공문서, 신문기사 따위를 근거로 의친왕을 평가하는 것은 결국 침략자의 시선에 종속된 역사 해석이다. 오히려 우리는 당대 독립운동가들의 증언과 자금 흐름, 그리고 일제가 그에게 가했던 집요한 감시의 흔적에서 그의 실질적 행위를 복원해야 한다.

의친왕은 또한 여러 해외 독립운동 조직에 상징적 지지를 보냈다. 황실 후손으로서 그의 존재는 독립운동 진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힘이 있었다. 대한제국 황자 이름이 독립운동 진영에 연루된다는 사실 자체가,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뒤흔드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였다. 

따라서 일제는 그를 철저히 고립시키고, 주변 세력과의 연결을 차단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조국 독립의 염원을 표현했고, 이는 민족사에 기록될 귀중한 행적이다.

오늘날 그를 폄하하는 이들은 역사의 전체 맥락을 무시한 채 단편적 증거만을 들이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의친왕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드러낼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가 감내한 제약은 무력의 표지가 아니라 '희생의 증거'였으며, 더 이상 왜곡된 평가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의친왕을 향한 억울한 비난은 그를 두 번 죽이는 행위이며, 나아가 독립운동 전체의 지평을 왜소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는 진실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의친왕 그는 분명히 그리고 당당히 독립운동가였다.

이종엽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