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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 <2>- '인천미두취인소' <중>

임경오 기자 기자  2005.10.08 10: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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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제학에서 말하기를 쌀은 흔히 가격 비탄력적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쌀공급이 조금만 부족해도 폭등하고 조금만 넘쳐도 폭락하는 속성이 있다. 요즘에는 쌀의 수요가 급감한데다 안전장치도 많으니 가격이 안정됐지만 예전에는 미곡가격이 매우 불안했었다.

게다가 일본의 수탈까지 겹치면서 미두가는 폭등과 폭락을 거듭하기 일쑤였으며 이러한 시세급변을 이용해 일확천금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미두장(=미두취인소의 속칭)에 속속 모여들었다.

가을 추수를 앞두고 풍년이 올지 흉년이 올지 잘만 맞힌다면 일확천금을 얻을수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금 제조업등 경기가 좋아질지 나빠질지 잘만 맞힌다면 주식이나 지수선물 거래로 돈을 벌수 있었던 것처럼...

인천미두취인소는 나날이 커나갔으며 이에 따라 정미시설도 크게 늘어나 1930년대엔 60여개에 달하기도 했다. 보통 정미소 하나에 수십명에서 수백명이 종사했으므로 그당시 인구 6만명정도였던 인천에서 정미업은 얼마나 큰 비중인지 짐작이 간다. 그무렵 창간된 '개벽지'는 "공장직공의 반 가량이 정미소에서 일하는 여공이었고 출퇴근 시간대엔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행렬이 장관"이었다고 묘사하기까지 했다.

선술집 고급요리집 기생소개소등 우후죽순

인천미두취인소 개장후 각지의 농산물이 인천항으로 몰려들면서 인천은 구한말 제1의 상업도시로 떠올랐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렸고 이에 따라 선술집에서 고급요리집이 우후죽순 들어섰으며 특히 부두노동자들을 상대로 값이 싼 호떡집 백반집등이 즐비했다.

쌀이 모이면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화류업계가 번창하게 마련. 그 당시 싸리재와 터진개(현 신포동) 일대에는 화월관이나 용금루 같은 일류 요정들이 성황을 이뤘고 용동에는 기생소개소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이 무렵에 창간된 '개벽'지는 "인천아 너는 어떤 도시?"라는 제목으로 인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처음 경기(京畿) 좌우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삼남(三南) 각지의 쌀을 긁어들이는 판에 어찌하다가 한번 천행으로 장님낚시에 물리는 고기와 같이 항하사(恒河沙= 갠지스강의 모래.수없이 많음)의 일립(一粒)만치라도 먹었다하면 이때가 일확천금의 천재일시라 하여 너도나도 덤비다가 밑천까지 잘리게 된 결과는 전당질로, 전당질은 영원방매로 마침내 귀신도 모르게 조상의 신주까지 들어먹고 형제처자가 이상하여도 어느 누가 말 한마디 불쌍하다고  않는 것이 미두쟁이 노름이다."

논밭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빼앗기고 얼빠진 부자들의 낱곡이나 돈뭉치는 미두 바람에 몽땅 날린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부작용이 심했지만 이러한 가운데서도 미두꾼중엔 '행운아'들도 종종 나타났다.

미두왕 '반복창' 최고 미인과 결혼 화제

당시 미두꾼으로 행운을 잡은 대표적인 사람으로 인천의 미두왕 '반복창(潘福昌)'이란 이가 유명했다. 경기도 강화 출신인 반복창은 정미소 말단 사환에서 거부로, 미두가 폭락으로 다시 무일푼으로 돌아간 풍운아였다.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한 정미소에서 사환으로 시작했다가 미두 중매점에서 현장대리를 지내는 동안 쌓은 경력과 탁월한 시세예측 능력으로 1920년초 투기를 시작한 것이 연거푸 적중, 벼락부자로 떠올랐다.

반복창이 전성기였을 때 그의 재산은 300만원이 넘었다.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수십억~수백억원 가치에 이르는 거부였던 셈이다.

그는 지금의 신신예식장 자리를 구입해서 돌축대를 쌓고 300평이 넘는 저택을 짓기도 했다.

또 '화동(花洞)자켓'이라고 불리던 당시 최고의 미인과 조선호텔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결혼식날 경인선 열차를 통째로 대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고 도는게 돈이련가. 그는 결국 쌀의 시세폭락으로 막대한 타격을 받고 쓰러진후 중풍으로 고생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미두 천재도 시장엔 못이겼던 셈이다. 시세는 시장에 물어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아무튼 미두장에서 현물이 아닌 기한부 선물거래방식을 취함으로써 미두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중매인을 통해 보증금을 예치하고 미두통장을 받았다.

보증금은 그 때 돈으로 쌀 1백석에 해당하는 1백원꼴로 그리 적은 돈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1백석 이하는 아예 거래를 하지 않았다.

보증금만 있으면 수천~수만석 매매

보증금만 갖고 수천~수만 석을 매매할 수 있어 미두장은 떼돈을 벌려는 미두꾼들의 투기대상으로 떠올랐다. 지금도 선물보증금 15%만 있으면 7000만원원에 육박하는 선물 한 계약을 살수 있으니 당시나 지금이나 선물시장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는 시장이라 아니할수 없다.
 
보증금을 뺀 잔금의 결제는 세가지 방법으로 이뤄졌다. 기미(期米)라고 해서 결제일을 한달 두달 세달후로 나눠 계약하는 것으로 결제전이라도 시세에 따라 가격이 떨어졌을 때 대량 매입했다가 가격이 올랐을 때 팔수 있었다.

시장은 전장과 후장 하루 두번씩 열렸으며 거래단위는 미곡 100석, 대두 50석이었다. 매매수수료는 미곡의 경우 100석에 대해 1원50전, 대두는 50석에 대해 50전으로 1~1.5% 꼴이었다.

미두시장의 투기성에 매료된 자본가들이 미두장으로 몰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10년엔 월간 거래량이 쌀20만석에 불과했으나 1918년엔 월간최고390만석까지 폭증, 그 해 전체거래량이 3233만석까지 늘었다. 이가운데 연 200만석이 넘는 쌀이 인천항을 통해 빠져나갔으며 가을 추수때가 되면 부두일대는 '쌀의 산'을 이루었다.

미두바람은 전국적으로 거세게 불면서 1916년부터 5년간 미두취인소 인가신청이 무려 35건에 달했으나 당시 조선총독부는 '경제의 후진성과 사행심 조장불가'라며 신청을 전부 기각했다.

이에 따라 국내 최초의 인천미두취인소만 유일무이하게 공인된 미두시장으로 군림하게 된 셈이다. 물론 1906년 부산과 1910년 군산에도 미곡시장이 들어섰으나 이들 시장은 선물시장이 아닌 현물시장이란 점에서 증권의 일종인 미두선물을 거래하는 시장이었던 인천미두취인소와 엄격하게 구별된다.

세계1차대전기간 유일무이한 인천미두취인소 등을 통해 일제가 쌀수탈을 합법화하고 쌀반출량이 크게 늘자 쌀값과 미두선물은 폭등하게 되고 3.1운동직전에 이르러선 민심은 극도로 나빠져간다.

다음주 인천미두취인소 <下>편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3.1운동이 일어나기 반년전 부산역 조선인 노동자 동맹파업과 같은달 종로 쌀 판매소의 폭동등 여러 시위를 읽게되면 당시의 인심이 얼마나 흉흉해졌는지 짐작할수 있다.

또 최근 엄청난 실적에도 불구하고 쥐꼬리만한 배당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당시 반기 배당률 75%(연간기준 150%)라는 엄청난 고배당의 일면도 소개할 예정이다.

*자료 제공 및 도움말 주신 분 = 증권연구가 위문복(www.aham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