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청계천을 지날 때마다 이 개천이 글자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천이었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으랴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 한 사람만이 가지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장안(長安0에 인구가 드물던 그 옛날에는 아마 이 냇물도 맑았기에 청계라고 이름 지었으리라.
그러나 요새 청계천은 그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의 폐기처분장화 한 감이 없지 않다. 지난 봄 아이들 통학관계로 청계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고 보니 자연 통근할 때도 여기를 지나게 되고, 이른 아침 일어나서 공원도 숲도 없는 이 근처에서는 청계천 주변을 산책하게 된다.
마당을 쓰는 계집애나 거리를 청소하는 사나이나 바에 걸리는 대로 청계천 아닌 이 청계천에 쓸어 넣는 것은 이른 아침이 아니라도 허다히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이른 아침이고 보면 두세번은 반드시 목관할 수 있다.
무심히 쓸어 넣는 이 광경을 보고 그냥 보고 지낼 수가 없어 돌아서서 “여보세요 그 흙이랑 구공탄재랑 개천에 쓸어 넣으면 어떻겁니까?” 한마디 한다. 대답하는 말이 “비가 오면 떠나려 가지 않아요.” “비가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요” 그 다음 말은 “나뿐만 아니라 동리 사람들 다하는 걸요.”
“딴 사람이 한다고 따라서 하면 이 개천이 막히어 큰비가 오면 홍수가 날 뿐아니라 보기에도 싫잖소? ” “그 아저씨 별간섭이야!” 말이 이쯤 나오면 설교 아닌 나의 부질없는 간섭도 중단않을 수 없다. 가끔 이러한 논쟁이 벌어지는 상대자가 주부이기도 하고 계집애기도 하고 때로는 사대부이기도 하다.
이렇게 몇 번이고 고언을 반복하고 나면 아침 산보의 기분은 사라지고 불쾌감을 억제할 수 없어 될 수 있는 대로 간섭 않기로 했다. 다못(다만) 너무 심한 것만 몇마디 하고 지낼 것을 마음 속으로 정하고 말았다. 사실 내 싸움으로는 별 효과가 나지 않은 것 같다. 큰비가 나리는 날이면 더 장관이다.
이 금방에 사는 주민들의 쓰레기는 모조리 다 이 개천으로 모여든다. 떠나려 갈 수 있는 것이라면 좋겠는데 가마니, 석탄재, 깡통, 드람통 심지어는 온돌방 뜯고 남은 흙이나 돌까지도 져다 넣는다.
개죽은 것, 쥐 죽은 것들, 악취나는 것도 물론이다. 언제나 관계관청에서 지시가 없더라도 흘러내리는 오수는 할 수 없을지언정 자진해서 좀더 깨끗하게 할 수 없을까?
개성에서 이곳에 천도한 이조 초엽부터 개천이라고 부르던 이 청계천의 준설공사는 일대 두통꺼리였었다. 세종 16년 위사인 이현노가 풍수설에 의해서 국도를 맑게 하기 위하여 개천에 오물 투입의 금지를 요청하였으나 집현전의 교리 어효등의 반대 상소로 말미암아 실현치 못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예전부터 말성꺼리 였던 모양이다.
이조실록에는 영조 36년2월에 영조대왕이 이 청계천의 불결참상을 통탄했다는 기록을 보면 사람의 시신까지도 버렸던 모양이다.
불결하고 매몰되어가는 이 계천을 정화, 준설키 위하여 영조는 영조 36년에 청계사라는 전문기관을 설치하였다.
330년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다가 최초로 준설공사를 하게 된 것은 역시 영조조 임실 2월8일에 한성판윤 윤홍계와 호조판서 홍봉계 등이 주창자가 되어 준설공사를 단행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도 시민 20만을 동원하고 돈 3만5천량과 쌀 2천3백석의 거자를 투입하여 57일이나 걸려서 이 공사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강우시에는 양뚝이 무너져 골머리를 앓다가 그후 13년이 경과한 영조 49년 6월에 쳥계천 양안을 전부 석축으로 고쳐쌓다고 하니 청계천관리의 고심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던 상 싶다.
‘용천사’가 생긴 후로는 해마다 준설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그래도 사태 등으로 맥히워지는 계천을 어찌할 수 없이 가끔 대준설공사를 시행했던 모양이며 흉년 때에는 용천사의 자력 노력의 미흡으로 군대를 동원하였고 대준설때마다 여러개의 다리, 수표교를 위시해서 장교(장차골다리), 하교(한교다리), 효교(새경다리)를 개수했다는 기사도 있다.
그 당시는 파낸 모래를 멀리 처치할 수가 없어서 계천 옆에 쌓아서 사구를 형성했던 모양으로 옛날 지도에 사구가 있는 것은, 즉, 이것을 말함이다.
수백년전에도 청계천 미화에 부심 했거늘 어찌 오늘갈이 인구가 격중한 대장안의 살림살이를 말아 보는 당국자가 소홀히 할 수 있을 것인가, 좀더 세심한 정책을 쓴다면 보다 더 정결히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거리를 쓸고 있는 청소부는 쓸어서 하수구에 넣는 것이 보통이고 자기 집 앞만 훤하게 쓸면 된다는 생각인지 양쪽 하수구를 처서 길가운데를 두드러지게 못할 망정 무엇이든 하수구로 쓸어넣는 것을 보면 신경질이 날 정도다.
이런 짓이 비록 철없는 아이나 무심한 아낙네가 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건전한 상식을 가진 주인이 보고도 모르는 척 한다면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다. 언제나 깨끗한 거리를 맑은 천변을 건축할 날이 올 것인가?
한강수를 끌어다 맑은 물을 흐르게 하고 고기도 놓아 기르고 양뚝에는 수목과 화초을 심는다면 숨가쁜 서울시민에게 이 얼마나 한줄기의 청량제가 될 것인가?
이것이 어디까지나 몽상이라면 청계천 전부를 지금의 무교동 같이 덮어 버리고 그위에 대로보다도 초목을 심게 할 수는 없을까?
이것도 꿈이라면 실험시킬수 있는 꿈일 것이다. 못하는 것은 결핏하면 우리의 빈약한 탓이라고 돌리지만 말고 없는 살림살이 일수록 요리조리 맞취 보다 나은 방안을 구사해낼 수 없을가?
향기 날리 없는 천변을 걸어가면서 시름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필자: 박문범 외무부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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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지금으로 부터 49년 전이자 청계천이 완전복개(1958년)되기 1여년전인 1956년 사상계 12월호에 실린 글이다.
당시 외무공무원이었던 박문범씨가 근무하고 있던 중앙청에서 늘 가까이 지켜봐 왔던 인근 청계천과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느낀 자신의 단상을 글로 써서 사상계에 기고한 것이다.
반세기만에 우리의 품으로 돌아온 '청계천'의 당시 모습을 이 글을 통해서 그려볼 수 있겠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