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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 <1>-쌀선물거래소 인천미두취인소 출범 [상]

임경오 기자 기자  2005.09.30 15: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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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이후 한국증시 개관. 역사적 꼭지점마다 증권주 파동 모습이 보인다.
 

 

내년 3월3일이면 증권거래소 개장 50주년이 됩니다. 또 근대적 의미의 증권거래소가 탄생된지 109년하고도 5개월이 지났습니다. 이 기간동안 한국증시는 역사적 고점에서 항상 증권주 파동이 일어났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921년 경취주(京取株)파동이 그러했고 1926년엔 조취주(朝取株), 1962년엔 증권주(= 大證株)파동이 그러했으며 사상최초로 1000포인트를 넘어선 1989년 다음해에 일어났던 증권우선주 파동이 단적인 예입니다.

 

 
         1894~1944년 일본증시 추이.전쟁기(노란색 마킹부분)마다 폭등했다 .
또 구한말 이후 일제의 강점기동안 조선주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일본의 주가는 전쟁만 나면 폭등을 했다는 측면에서 2003년 이라크전 이후 상승세로 돌아선 미국증시와 비교가 되는 한편 단편적이나마 미국증시의 미래를 점치게 해줍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증시는 400% 급등했고 특히 러일전쟁에서 승리한후 조선과 강제 을사조약을 체결, 800% 폭등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백성의 피와 눈물이 그들에게는 부를 갖다준 셈입니다. 또 1차대전때는 500%나 오르기도 했습니다.

1차대전기간 일본이 크게 오르면서 일본증시와의 동조화 현상으로 '사진시세'란 비아냥을 듣기도 했던 조선 증시의 미두 선물도 급등, 쌀값이 4년여만에 600%안팎 폭등하는 단초를 제공하면서 3.1운동의 증폭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6.25한국전쟁때 특수를 누리기도 해 '한국의 고난= 일본 증시 급등'이라는 역사적 등식이 되풀이되곤 했습니다.

이에 본지는 창간특집으로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란 시리즈를 장기 연재함으로써 과거를 재조명하는 기회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증시는 항상 일정한 파동을 그리면서 역사적 반복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정확히 아는 것은 현재의 투자 지침이 됨은 물론이요 미래를 전망하는데 대한 유용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史實)과 조선총독부등의 각종 사료 및 사진등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이는 한국 증시 110년 역사상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것으로 깜짝 놀랄만한 비주얼 자료를 다수 제공하게 됩니다.

본지가 심혈을 기울여 매주 토요일에 싣게 되는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에서는 구한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광복후 현재까지 나타난 각종 사건및 파동의 원인과 배경 결과등을 낱낱이 기록하게 됩니다. 또한 각종 비화 일화등도 다양한 자료들과 함께 그 모습을 백일하에 드러낼 계획입니다.

네티즌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뜨거운 성원을 부탁드리며 행여 검증 부족등으로 잘못된 곳이 있다면 아낌없이 질책을 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근대적 의미의 첫 증권거래소 인천미두취인소 출범

 

 
미두선물거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한 소설 탁류 표지.

 

"쌀좀 팔아주세요(사주세요의 전라도식 사투리)" "알았습니다. 팔아드릴게요"
얼마후 쌀값이 급등하자 희색이 만면한 투자자는 중개인을 찾았다. 그러나 청천벽력같은 결과가 투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개인은 쌀팔아달라는 말을 선물매도로 이해하고 선한(3개월물)을 매도쳤던 것이다. 전라도가 고향인 투자자는 매수주문 내달라는 거였는데 중개인은 전라도 사투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곧이 곧대로 매도쳐버렸던 것이다.

거액의 이익을 봤다고 생각한 투자자는 순식간에 거대 손실로 상황이 뒤바뀌자 멱살잡고 실랑이하면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위 내용은 채만식이 1930년대 발표한 탁류란 소설의 소재로 나온 내용을 간추려 올린 것으로 미두 선물거래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위 소설내용처럼 미두 선물거래를 담당한 근대적 의미의 첫 증권거래소는 일본에 의해 세워진 인천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속칭 미두장)로 1896년 5월 설립됐다. 이 취인소는 지금 미국 시카고의 곡물거래소(CBOT)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일본은 쌀값안정과 품질 향상을 위한다는 구실로 주요 미곡상을 중심으로 설립했지만 결국은 쌀 수탈을 위한 것이다. 설립자가 일본 영사인 可來榮太郞인 것만 봐도 이는 분명하다. 인천미두취인소는 1898년 10월 문을 닫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 거류민에 의해 1899년6월 다시 재개장했다.

초기엔 미곡 대두 석유 명태 방적사 목면 광목 등 7종의 상품에 대해 거래했으나 운영이 부진하자 1904년 거래상품을 미곡과 대두로 한정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후 조선의 미곡과 대두의 수출이 급증하자 거래량도 늘면서 하루 100만석을 넘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어 인천미두취인소는 조선과 일본을 통들어 도쿄와 오사카 다음가는 미두거래시장으로 컸으며 미두거래로 현재 화폐가치로 수백억원의 재산을 모은 미두꾼도 등장하게 된다.

다음주에 자세하게 언급하게될 경기 강화 출신의 한 '미두왕(王)'이 대표적인 미두꾼이요 행운아였으며 말년에 쓸쓸한 최후를 맞기도 했던 풍운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