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춘향전에서 암행어사로 돌아온 이몽룡은 변 사또를 향해 '금준미주 천인혈 옥반가효 만성고(金樽美酒 千人血 玉盤佳肴 萬姓膏·금잔의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다)'라는 시를 읊는다. 피와 한이 담긴 조선시대 백성의 원성이 21세기 국내 굴지의 증권사 건물 앞에서 퍼져 나왔다.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사무금융노조)은 22일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동부금융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임금체불과 최저임금법 위반 논란과 관련해 고용노동부 서울남부지청에 고원종 동부증권 사장을 고발하고 사퇴를 요구했다.
이날 이기철 사무금융노조 수석부위원장은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과 고원종 사장 등 경영진들의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있다"며 "최근 동부증권의 행태는 철저하게 노동자들의 등골을 빨아먹는 '노동자 등골 브레이커'가 아닐 수 없다"고 날을 세웠다.
◆성과제 C제도? 사실은 '징계'… 희망퇴직제도보다 '악랄'
최근 동부증권은 계약직 영업 사원들의 연차 수당과 퇴직금 등을 때맞춰 지급하지 않아 논란을 빚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이 지난달 2일 동부증권에 보낸 시정지시서에는 동부증권이 직원들에게 연차수당 1억5000만원을 제때 주지 않았고 최저임금법에 미달된 금액을 지급했다며 이에 대한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러나 동부증권은 노동청 감사 직전에 임금채권소멸시효인 3년 치 임금만을 돌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 회사에서 정한 영업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한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고 비정규직 전환을 강제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노조 관계자의 주장대로라면 동부증권은 징계성 성과체계인 'C제도'를 만들어 C등급을 받은 직원의 임금 70%를 삭감했다. 나아가 이들에게 비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해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지급했고 고원종 사장 취임 후에만 300여명의 직원들이 부당함을 견디지 못해 회사를 나갔다.
이 수석부위원장은 "동부증권이 희망퇴직제도를 실시하지 않은 것은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제도 없이도 언제든지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노동조건을 저하시킬 수 있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는 희망퇴직보다 훨씬 저열하고 비열하고 악랄한 구조조정 방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더해 김호열 증권업종본부장은 "통상적으로 고임금을 받는다고 여겨지는 금융투자업계에서 최저임금 수준도 주지 않는 사례는 동부증권뿐"이라며 "연봉 5000만~6000만원 이상의 정규직들이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을 선택했고 그 이후에는 최저임금도 못 받게 됐다"고 말을 보탰다.
비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부서장이 다른 지점으로 발령해 영업기반을 말살하겠다고 협박해 정규직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비정규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어 "우리나라 노동법은 법을 위반한 자들에게도 월급의 5% 이상을 삭감하지 못하게 하는 등 노동자 임금을 함부로 삭감할 수 없도록 정해놓고 있다"며 "실적 부진을 이유로 월급 70% 삭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짚었다.
이에 동부증권 측은 "올해 초부터 C제도 개선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노조의 주장은 이미 조치가 완료된 사안"이라며 "제도 변경 전에도 C등급을 부여받은 직원들은 실적과 업무성과가 극히 낮은 이들로 전체 직원의 1% 이내였다"고 해명했다.
직원 수 급감에 대해서는 "2012년부터 증권시장이 어려워지면서 동부증권뿐 아니라 모든 증권사들은 인력 효율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며 "인력 감원은 처음부터 의도를 갖고 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했던 조치"라고 역설했다.
◆금융투자업계 '갈라파고스섬'… 국정감사 증인 신청
김 본부장은 동부증권이 마치 금융투자업계의 '갈라파고스섬' 같다고 비유했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1000㎞ 정도 떨어진 태평양에 위치한 갈라파고스 제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다른 생태계와의 교류가 전혀 없다.
그는 "동부증권에서 벌어지는 부당행위들은 다른 회사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라며 "이러한 행태들이 일상적으로 자행된다는 점에서 동부증권은 갈라파고스섬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고 쓴소리를 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김 본부장은 최근 여직원 상습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김준기 회장의 발언에서 맥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피해자가 경찰에 제출한 영상과 녹취록에는 김 회장이 '너는 내 소유물이다. 반항하지 마라'라고 발언한 것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김 본부장은 "이것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대재벌 김준기 회장의 노동에 대한 인식이고 경영철학"이라며 "이는 직원들이 단순히 본인의 소유물이니 얼마든지 임금을 삭감하고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19세기 노비를 부리던 저열한 양반 의식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정희성 동부증권지부장 역시 "이번 사건은 김준기 회장 개인의 파렴치한 성추행 사건이 아니"라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거짓된 역사와 자본의 실체이자, 돈이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재벌 갑질의 전형"이라고 동조했다.
특히 정 지부장은 고원종 사장의 경영철학 또한 김 회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제언했다. 고원종 사장은 동부증권 825명의 직원들을 '개, 돼지만도 못한' 물건으로 생각하는데, 임금 70%을 삭감해도 반항하지 말고 동부증권 노예로 살라는 것이 그의 경영철학이라는 것.
아울러 이근영 전 금융감독원장이 김 회장의 후임으로 지목된 것이 고원종 사장의 장기집권에 힘을 실어줄 것이 자명한 만큼 동부그룹의 수많은 적폐들을 없애고 비정상을 정상화려면 김 회장에 이어 고 사장의 동반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정 지부장은 "80세인 이 전 금감원장이 2만명이 넘는 직원을 책임지고 경영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사실상 '바지 회장'에 불과하다"며 "이 전 금감원장은 고 사장의 매제인 이종구 바른정당 의원과 상당히 막역한 사이인 만큼 고 사장이 동부그룹 실세로 부상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언급했다.
여기 대응해 동부증권 관계자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이 전 금감원장이 2008년에 계열사 사외이사로 있었다는 것도 최근에야 언론보도로 접했다"고 당혹감을 드러냈다.
이런 가운데 사무금융노조와 동부증권 지부는 고 사장이 물러날 때까지 각종 수단을 동원해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이를 위해 내달 예정된 국정감사에 김 회장과 고 사장을 증인으로 신청한 상태다. 노조 측은 이 두 사람이 증인으로 채택되면 고 사장 사퇴가 결정될 때까지 투쟁을 이어갈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