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재계순위 상위 10위권에 오르내리는 대기업들이 문재인 정부와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지배구조 개선과 불공정행위 근절, 주주권익 강화 등 재벌기업을 겨냥한 껄끄러운 주제들이 연일 여론을 달구는 탓이다.
최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와 장하성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 인선은 '재벌 저격수' 콤비의 동시 출격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재계순위 상위권'을 개혁대상으로 공개 지목한 배경과 함께 가장 껄끄러운 쟁점이 됐다.
올해 5월 기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은 31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총수(오너)가 있는 재벌그룹을 자산총액 순으로 줄 세우면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GS △한화 △현대중공업 △신세계 △두산 등이 상위 10개사로 꼽힌다.
◆재계순위 13위 두산, 눈에 띄는 이유
눈에 띄는 것은 포스코와 농협, KT가 빠진 자리를 대신해 10위에 턱걸이한 두산(000150)이다. 26개 계열사 가운데 7개 상장사를 거느린 두산은 순환출자, 금산분리 등 주요 잼정에서 한발 물러난 덕에 지금까지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11년 전인 2006년 1월 두산이 국민 앞에 공약한 '두산식(式) 신지배구조 개선안'을 기억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공언했던 개선안 상당수가 구색 맞추기에 그쳤고 심지어 일부는 퇴보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약속이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 등 오너일가의 비자금 조성, 횡령 및 배임 등으로 악화된 여론을 의식해 내놓은 극약처방이라는 점이다.
개선안의 내용은 △그룹 회장 외부영입 △3년 내 ㈜두산 지주회사 전환 △이사회 중심 계열 독립경영 △준법감시인 신설 △이사회 기능 강화 등이 주였다. 특히 이사회 기능 강화를 위해 △서면투표제 도입 △내부거래위원회 설치 △사외이사 후보추천위·후보추천자문단 설치 추진도 포함됐다.
하지만 지난 1월 경제개혁연대의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 공약과 이행 현황' 자료에 따르면 이 중 실현된 것은 회장 외부영입과 서면투표제 도입,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와 자문단 운영 정도로 실질적인 지배구조 개편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핵심인 두산의 사업형 지주회사 전환은 단계적 인적분할을 거쳐 2010년 완료됐지만 불과 4년 만에 없던 일이 됐다. 2014년 말 기준 자회사 주식가액이 자산총액 50%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주회사 기본 요건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형제의 난' 이후 11년 만에 '도로 박(朴)'
그룹 회장직을 폐지하고 지주사격인 두산의 CEO를 외부에서 수혈한다던 약속은 일부 실현됐다. 2006년 9월 영입된 제임스 비모스키 서던뱅크(말레이시아) 수석부행장은 두산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2015년 3월 임기 만료까지 9년 가까이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박병곤 명예회장의 장남 박정원 회장이 후임으로 선임되면서 사실상 과거의 지배주주 중심으로 회귀했다.
여기에 박용만 회장이 이끄는 두산인프라코어(042670)는 지배구조 개선안 발표 직후인 2006년 3월 도입했던 집중투표제를 폐지한 것도 논란거리다. 집중투표제는 선임되는 이사 수만큼 주식 1주마다 의결권을 주는 것으로 대주주의 전횡을 견제하는 수단 중 하나인데 이를 이사회가 앞장서 없애버린 것이다.
이수정 경제개혁연대 연구원은 "두산의 경우 이사회 중심의 계열 독립경영 약속도 실천 여부가 명확하지 않다"며 "2006년 17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해 유죄 판결을 받은 박용성, 박용만 회장은 이듬해 특별사면을 계기로 모두 주요 계열사 이사로 재선임돼 과연 지배구조 개선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고 꼬집었다.
그나마 두산이 내놓은 과거 개선안 가운데 가장 착실히 이행된 부분은 독립적인 이사회 운영이다. 상장한 7개사에 감사위원회를 갖췄고 오리콤(010470)을 제외한 나머지 상장계열사는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와 내부거래위원회를 마련해 외형적으로는 이사회 기능을 강화한 모양새다.
다만 두산 이사회 참석률은 88.1%(2015년 4월 말 기준)로 총수가 있는 대기업집단 10개 기업집단 가운데 GS(86.6%) 다음으로 저조했다. 특정 집단과 학연으로 엮인 구성원도 문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개된 주요 계열사의 사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두산그룹 이사회는 △경기고 △김앤장 △전관(前官) 이 세 단어로 축약된다.
◆두산 이사회 '경기고·김앤장·전관' 삼박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유독 전관 출신 거물이 많다는 점이다. 법조계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전관예우가 대기업 이사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두산중공업(034020)의 경우 김동수 전 공정위원장이 감사위원장을 맡은 가운데 전 재정경제부 2차관 출신 임영록 전 KB금융지주 회장이 감사위원으로 등기돼 있다.
오리콤은 이명박 정부에서 법무부장관과 국정원장을 지낸 김성호 행복세상 이사장이 감사위원회를 이끌고 있으며 한승수 전 국무총리와 윤증현 전 금융감독원장, 김대기 전 통계청장이 모인 두산인프라코어는 이사회는 국무회의장을 방불케 한다.
송광수 전 검찰총장과 김창환 전 부산지방국세청장은 두산의 사외이사로 재직 중이고 두산건설(011160)은 김영주 전 산업자원부 장관과 천성관 전 서울중앙지검장이 포진해 있다.
또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의 그림자도 짙다. 김앤장은 두산밥캣(241560)의 IPO 자문과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 매각, 두산건설 HRSG부문 양도거래 등을 대리했다. 김앤장에게 두산은 중요한 고객인 셈이다.
김앤장 인사로는 9년째 두산그룹과 인연을 맺은 김회선 전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적이다. 올해 두산밥켓 사외이사가 된 김 전 의원은 서울서부지검장을 지냈고 두산그룹 '형제의 난'에서 김앤장 소속 변호사로서 박용성·박용만 회장을 변론했다. 두산밥켓은 사외이사 4명 중 절반이 김앤장 변호사다.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지낸 정병문 변호사와 송광수 전 검찰총장은 각각 김앤장 소속 변호사와 고문으로 현재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의 감사위원을 맡고 있다. 차동민 전 서울고검장(두산중공업)과 천성관 전 서울중앙지검장(두산건설)도 김앤장 소속이다.
박용성·박용만 회장이 졸업한 경기고 인맥도 이사회에 등용됐다. 김 전 의원을 비롯해 임영록 전 회장, 천성관 전 지검장, 김창환 전 부산국세청장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사회 건전성을 추구하는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이와 관련해 부적절하다고 꼬집었다.
연구소 측은 "최근 3년 이내에 계열사 또는 최대주주 등과 자문계약 등으로 피고용 관계를 맺은 경우 소속 인사를 이사로 선임하는 것은 이사회 독립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오너일가와의 학연 역시 우리나라 정서상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방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한편 김상조 내정자와 장하성 정책실장 모두 '재벌 때리기'식의 인위적인 규제는 하지 않겠다며 한 발물러선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련의 사례들처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재벌기업이 공개적으로 자정노력을 소홀히 한다면, 이를 방관하는 자체가 재계에 나쁜 시그널이 될 수 있다.
이를 의식한 듯 김 내정자는 18일 간담회에서 대기업 전담조사조직인 기업집단국 신설을 공언했으며 공정위는 최근 대기업들로부터 받은 내부거래 자료를 꼼꼼하게 분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