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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칼럼] 몬탈치노의 하늘

서유순 코치 기자  2017.01.03 11: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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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여행이다. 출장처럼 미리 짜인 일정이 아니라 그저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하는 그런 여행 말이다. 
 
은퇴를 하자마자 선택한 첫 번째 여행지는 이탈리아였다. 이곳 정보를 찾던 중 마음에 끌린 책은 언론인 손관승씨의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직장생활을 어느 날 그만두고 정직한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낯설고 고독한 여행길을 떠났다는 그의 여행 동기가 35년 조직생활을 막 끝내고 첫 여행을 떠나려는 나의 여행 목적을 한껏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 여행지도 같은 이탈리아 아닌가.

200여 년 전 어느 날 새벽 홀연히 떠난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책에 나온 루트를 따라 그는 한 달 동안 7000km를 주행했다.

그러면서 그가 깨달은 삶에 대한 통찰들을 나도 직접 체험하고 싶었으나, 눈비 내리는 산악 길 고생담을 읽고는 슬쩍 마음을 접었다. 무엇보다 한 달 동안 그렇게 많은 곳을 누비는 여행은 내키지 않았다. 
 
일단은 이탈리아 주요 도시들을 돌아본 후에 본격적으로 머무는 여행지로 토스카나를 고르고,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그 곳에 대한 정보가 단편적이고 마을 이름들이 너무 생소해 여행 지도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 '토스카나의 지혜(The Wisdom of Tuscany)'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저자 페렌츠 마테(Ferenc Mate)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살다가 화가인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1990년대 초 토스카나 몬탈치노로 이사를 왔다. 그들은 13세기 수도원 건물을 사서 집으로 개조하고 주변 포도밭을 손수 일구어 마테와이너리(Mate Winery) 브랜드를 가졌었다.

20년 넘게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과 풍습을 익히면서 얻은 생각과 지혜를 소박하고 평화롭게 전하고 있는 이 책에 나는 완전 매료됐다.

'그래, 계획은 무슨. 이 마테 씨가 사는 몬탈치노를 한번 가보지 뭐.'

이것이 내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수많은 아름다운 마을 가운데 몬탈치노를 선택한 이유였다.
 
버스 차창 너머로 들어오는 몬탈치노의 풍경은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아름다워 숨이 막힐 정도였다. 삼각형으로 길게 벋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가지런히 끝없이 서있는 넓은 포도밭,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부드럽고 푸른 밀 밭, 그 위로 언덕 마을이 보였다.

천 년이 넘는 성벽과 성당 아래 광장이 있고, 골목길을 따라 아주 오래되고 정겨운 집들과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인….

혹여 잘 몰라서 하루만 예약하고 온 이곳에서 나는 아흐레를 묵으며, 마음과 발길 가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그날은 인적이 끊긴 어느 산길을 걷고 있었다.  바람 소리 풀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호수처럼 투명한 파란 하늘의 흰구름들이 멈춘 듯 천천히 흐르는 평온함 속에서 문득 감사함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나를 세상에 낳아 주신 부모님에게, 존재만으로도 충만한 형제들에게, 조직의 핵심가치를 철저히 지키게 하는 훈련으로 전인적 인간에 대한 눈을 뜨게 해준 나의 훌륭한 회사와 리더들에게, 나의 좌충우돌 조직생활을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헤아릴 수 없도록 도와준 상사들과 동료들과 부하직원들에게, 나의 잦은 야근으로 셔터가 내려진 주차장 문을 수 없이 열어주어야 했던 경비아저씨들에게, 가끔 연락해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친구들에게, 바깥사람들과 절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쓰느라 정작 가장 소홀히 대했던 가족들의 인내와 사랑에, 그리고 지금 이렇게 멋진 곳으로 나를 인도한 보이지 않는 손의 깊은 뜻을.   
 
동시에 미안함과 창피함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관심과 배려보다는 속도와 성과에 대한 나의 집착으로 상처받았을 동료들과 부하직원들에게, 주도적이지만 건방질 수 있었던 나의 태도를 포용해준 상사들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 조직의 대의명분으로 일터를 떠나며 고통을 받았을 많은 조직원들에게, 그리고 내가 저지른 크고 작은 수많은 실수들 때문에.
 
마치 스스로에게 긴 고해성사를 하고 난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는 그 손이 나의 허물을 거둬줘 깨끗이 청소가 된 느낌이었다. 따듯한 눈물이 흐르며 그윽한 평온함이 내 몸과 마음에 가득 채워졌다. 나를 몬탈치노로 이끈 마테씨의 글이 생각났다.

'토스카나의 대자연은 나 자신에게 있었는지도 몰랐던 내면의 풍요로움이 저절로 밖으로 흘러나오게 하는 곳이다.' 
 
지금 코칭이 있는 날이면, 그날 몬탈치노 산골에서 나눴던 나와의 깊은 대화와 그를 통해 체험한 정결하고 평온한, 풍요로운 마음을 가지고 고객을 만난다.

     
서유순 코치 / (현) 코칭경영원 파트너코치 / (전) 라이나생명 인사 부사장 / (전) 듀폰코리아 인사 상무 / 공저 <여성리더가 알아야 할 파워코칭> <조직의 파워를 키워주는 그룹코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