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영웅과 사랑, 서민의 노래(귀족 풍자), 예술과 대중의 조화…. 11세기부터 이어진 프랑스 대중음악 '샹송'의 변천사입니다. 이처럼 음악은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때로는 표현의 자유와 사회 비판적 목소리를 투영하기 위한 도구로도 쓰입니다. 'M&M(뮤직 앤 맥거핀)'에서는 음악 안에 숨은 메타포(metaphor)와 그 속에 녹은 최근 경제 및 사회 이슈를 읊조립니다.
슬픔은 소중했던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상실감의 표현입니다. 슬픔을 유발하는 중요한 상실의 대상을 정리하면 사람, 물건, 지위, 가치를 꼽을 수 있죠. 과거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릴 때의 아릿한 향수(nostalgia)도 상실감에서 비롯된 슬픈 감정입니다.
슬픔의 원인은 내 잘못이라기보다는 보통 외부에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슬퍼질 수는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슬픔뿐만 아니라 죄책감이나 자괴감을 동시에 느끼기 마련이죠.
다섯 번째 「M&M」에서 다룰 곡은 영국 얼터너티브 록 밴드 라디오헤드(Radiohead)의 '자괴감'이 만들어낸 '마이 아이언 렁(My iron lung)'과 '나이스 드림(Nice dream)'입니다.
가장 크게 히트한 단 한 곡의 무게가 한 밴드에게 패닉을 안겨준 것은 유명한 일화죠. 앞서 말한 자괴감의 히트곡 중 최고는 라디오헤드의 이상형인 여자에게 고백은커녕 말도 못거는 남자의 심정을 담은 '크립(Creep)'인데요.
1집 앨범 'Pablo Honey(1993년)'에 담긴 크립은 발매되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와 지지를 받으며 전설적인 노래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큰 인기 탓에 이 한 곡이 라디오헤드의 과거와 앞으로의 활동 전체의 발목을 잡아버리는데요. 크립 이전의 그들이 했던 음악들은 크립 수준이 아니며, 이후의 곡들조차 크립을 능가하지는 못한다는 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라디오헤드는 크립이 아닌 모든 곡에 담아낸 노력과 예술성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기에 이릅니다. 자괴감을 노래하고 자괴감에 빠진 셈이죠.
실제로 라디오헤드는 지난 2009년 8월30일 영국 리딩 페스티벌 이후 크립을 공연장에서 절대 부르지 않는 자체 금지곡으로 정하기까지 했죠. 올해 5월23일 '프랑스 파리 르 제니스 아레나'에서 열린 단독 공연에서 7년 만에 '크립'을 라이브로 열창하긴 했지만 그들은 '크립의 그림자 뒤에서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라디오헤드의 자괴감은 다음 앨범 'The Bends(1995년)'에 수록된 '마이 아이언 렁(My iron lung)'으로 이어집니다.
이들은 2집에 일렉트로닉 친화적인 기량을 펼치는 동시에 반항적이면서도 심약한 정체성을 지닌 곡들을 담았는데요. 그중에서도 마이 아이언 렁은 크립에 가려진 밴드의 자괴적 심정과 신경질적인 분노를 잔잔하게 표현해 냅니다.
신념, 넌 날 궁지로 내몰기만 할 뿐이지. 네가 하는 일이 늘 그런 거지, 뭐. 넌 진심이 아니겠지만 그건 정말 미칠 정도로 아프다고. 내 머릿속에서 말하길 난 고문당하고 있다는 거야. 내 생명유지장치에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내 철로 만든 폐 말이야. (중략) 이게 우리가 새로 만든 노래. 지난번 노래하고 똑같을 뿐이지, 완전히 시간만 낭비한 셈인가. - My Iron Long 중.
마이 아이언 렁의 가사인데요. 크립 같은 명곡을 바라는 팬들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을 노래하면서도 이미 공개한 자신들의 음악을 시간낭비라고 자책합니다.
노래 후반부에는 'if you are frightened, you can be frightened. you can be that's ok(만약 겁이 나면 겁을 내도 괜찮아. 그래도 돼, 괜찮아)'라며 자조적인 자기위로를 라디오헤드 특유의 전자음에 섞어 내지르기도 합니다. 누가 봐도 자괴감이죠.
하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본인의 자괴감 아닌 자괴감으로 여러 코미디언들에게 자괴감을 안겨준 사람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모두 잘 아시겠지만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롭기만 합니다." '이러려고 저를 대통령으로 뽑아 주신 게 아닐 텐데' 가 맞을 텐데요... 라는 명대사를 리듬 없는 라임으로 읊조린 길라임 박근혜 대통령인데요. 대국민 담화로 올해 최고의 유행어를 만들었죠.
지난 4일 '2차 대국민 담화'를 통해 언급한 박 대통령의 자괴감은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내가 이러려고 ○○했나'라는 등의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며 조롱거리로 사용되고 있죠.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라는 표현을 외신들이 어떻게 번역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가운데 라디오헤드의 크립이 완벽한 번역으로 공감을 얻은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박 대통령의 현재 심정은 라디오헤드의 자괴감으로 탄생된 두 번째 곡, 나이스 드림과는 소름끼치도록 흡사한 모습일 듯합니다.
그들은 나를 형제처럼 좋아해줬어. 그들은 날 보호해주고 내 얘길 들어줬지. 그들은 오직 나만을 위한 정원을 만들어주고, 나에게 햇볕을 쬐어주며, 날 행복하게 했어. (좋은 꿈, 멋진 꿈, 행복한 꿈) 나는 천사 같은 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자동음성메세지만 남겨놓고 나가버렸네. 그녀는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말을 했지만, 그 바다는 우리 전부를 감전시켜 죽여버릴 뻔 했어 - Nice Dream 중.
짧지 않은 가사지만 중략 없이 옮겨다 적은 이유를 모두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나이스 드림은 몽환적인 어쿠스틱 연주로 우울한 현악 사운드와 나직한 보컬이 시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곡인데요.
라디오헤드는 실화를 통해 영감을 받기로 유명하죠. 아마도 그들 중 하나는 가까웠던 사람을 잃어 상실감을 노래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게 사물일 수도 있고요.
박 대통령의 경우는 어떨까요. 박정희 유신독재 타도 뒤 '측근들 배신'에 치를 떨었던 박 대통령은 탄핵 위기가 도래한 지금, 다시 측근들의 배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김기춘·안종범 등 청와대 참모는 각종 범죄혐의를 떠넘기고, 서청원 등 친박 중진은 퇴진을 요구합니다.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은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의 774억원 강제 출연 등 혐의가 '대통령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검찰에 진술했죠. 차은택 비리 관련 의혹에 김기춘 전 비서실장도 '대통령 지시'를 받아 차 씨를 만난 적이 있다는 식으로 잘못을 떠넘겼습니다.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은 약품구입 의혹에 대해 '구매 관리는 전적으로 청와대가 한다'고 발을 빼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박 대통령을 도와준 인연'이 있는 최순실마저 대통령 연설문 등 불법 입수 경위를 '대통령의 부탁'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지경이죠. 아마도 지금 박 대통령은 상실감에 치를 떨고 있지 않을까요?
불법으로 이권을 챙기려 했던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만천하에 드러나는 중이죠. 지금보다 더 놀랄 일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나이스 드림의 마지막 구절을 소개하지 못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