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전 세계 조선업계에서 공급 과잉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한국 조선업계는 서로 눈치싸움을 하느라 대응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생산량 감축뿐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하지만, 누가 얼마나 줄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지난 19일부터 이틀간 경상북도 경주 현대호텔에서 '제25회 세계조선소대표자회의(JECKU)'가 개최됐다. JECKU는 △한국 △일본 △중국 △유럽 △미국 5개 지역의 조선기업 CEO 등이 모여 조선업황을 논의하는 연례행사로, 기존에는 친목을 다지는 의미가 강했지만 올해는 최근 업황 불경기로 인해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기조연설을 맡은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은 "올해 1~9월 발주량은 866만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로 과거 5년 평균 대비 약 70% 이상 감소했고 신조선가도 15%가량 하락했다"며 "미국 등 많은 국가의 대선, 보호무역주의 확산, 파리기후협약, 황배출 규제, 선박평형수 처리협약 등 환경관련 국제규정은 시장의 불확실성을 더욱 확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국제유가 상승·해양플랜트 발주시장 개선 등으로 다소 희망이 있었던 최근 시각과는 정반대의 보수적 관점으로, 이날 각사 CEO들은 조선산업의 과잉공급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며 이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라야마 시게루 가와사키중공업 회장 및 일본조선협회장은 "최근 수년 동안 운송물량 증가량보다 훨씬 많은 선박이 건조됐다"며 "과잉공급이 시장회복을 지연시키고 있는 데다 지금도 선박수요보다 공급이 증가한다"며 현재 업계 상황을 진단했다.
이어 "일본은 과거 두 차례 구조조정을 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며 "구조조정 이후 수요가 회복단계에 접어들었을 때도 제한된 인력과 시설을 유지하며 조선소를 효율적으로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우리나라 조선 빅3인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이 문을 열고 체제를 갖춰가던 시기인 1976년과 1987년 두 차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조선산업 전반을 재편한 바 있다.
당시 일본의 구조조정은 일괄적인 설비 감축 및 수주 선박 표준화를 주요 내용으로 해, '고객사의 요구에 100% 맞춘다'는 국내 조선업계와는 상반된 전략을 펼친 바 있다. 그 결과 일본은 조선업 수주량 점유율 20%대로 떨어지며 한국에게 1위를 내줬다.
그러나 최근 일본의 재도약이 돋보이고 있다. 영국의 해운·조선 전문 분석기관 클락슨 리서치에 따르면, 10월 현재 한국의 수주잔량은 2233만8741CGT로 전 세계 수주량의 23.8%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은 2111만2949CGT를 기록했다. 이는 전 세계 대비 22.5%로, 한국과 일본의 수주량 차이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한국의 수주잔량이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데에는 인도량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올 들어 한·중·일 3국이 건조해 선주에게 인도한 총 인도량은 △한국 969만0271CGT △중국 848만3984CGT △일본 562만9607CGT를 기록했다. 다른 나라보다 수주량은 많지 않으면서 인도량은 월등히 많아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것 .
아울러 궈다청 중국선박공업행업협회장은 "중국 조선업은 이미 생산능력을 많이 줄였지만, 여전히 저가 제품 중심의 사업구조와 부족한 연구개발 능력과 기술력, 빠르게 증가하는 인건비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며 "과잉공급을 해결하고 연구개발 능력을 키워 고가제품으로 전환하는 게 가장 큰 현안"이라고 말했다.
국내 조선산업 종사자들 역시 공급과잉 상황과 감산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으나 '누가 어떤 방식으로' 줄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이미 정성립 대우조선해양 사장이 지난 5월 "조선업계 전체적으로 생산량을 줄이는 고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각 기업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일괄적 감산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책은행이 모기업인 대우조선과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 입장이 같을 수 없고 또 다른 중소조선사와 대형조선사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며 "해양플랜트 가격경쟁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업들끼리 경쟁하다 자멸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JECKU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회의를 마무리하며 "최근 몇 년 선박 과잉공급으로 가격이 하락하고 동시에 수요도 줄었다"며 "조선업이 완전히 회복하고 수요와 공급의 격차가 줄어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는 내용의 의장 성명을 채택했다.
해당 성명에는 "현재 신규 발주 감소로 대부분 업체가 어려운 가운데 상황이 조만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며 "조선업체들은 건전한 시장 회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공통된 시각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담겼으나, 구체적인 생산량 감축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