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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엄마 희로애락]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지금과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는 그때의 차이

이수영 기자 기자  2016.09.09 13: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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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며칠 전 친정엄마께 둘째를 맡기고 산책 겸 집을 나섰다. 아침도 거른 채 마감을 했고 집밥이 질리던 참에 동네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사이즈업으로 주문한 버거 세트를 챙겨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시간을 살짝 넘긴 터라 주위는 한산했다. 필자처럼 혼자 식사를 해결하러 온 '혼밥족'이 셋, 친정엄마 연세쯤 돼 보이시는 여사님 일행 다섯 분이 전부였다.

혼밥족들이 스마트폰 등에 집중한 동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여사님들 뿐. 백색소음으로 치기에는 일행과 가까이 앉은 탓에 의도치 않게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누가 언제 산 땅이 호재를 맞아 집 평수를 넓혔다는 등의 주변인발(發) 재테크 성공담에서 아직 어린 손주 근황까지 평범한 주제에 슬슬 흥미를 잃어갈 즈음, '며느리'라는 단어가 귓구멍을 파고든다.

나 역시 며느리 직함을 쥐고 있는지라 제 발이 저렸나보다.

다소 김빠졌던 대화는 '며느리'가 등판(?)하자 활기를 넘어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워졌다. 아침드라마에서 봤음직한 시어머니들의 '며느리 뒷담화'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례를 자랑했다. 일면식도 없는 여사님들의 며느리들을 대신해 (속으로)해명 댓글을 달기 시작한 것은 반발심과 함께 억울한 기분 탓이었다.

"우리 며느리는 도대체 물건 아낄 줄을 몰라. 글쎄 애 돌 되자마자 애기용품을 싹 치워버린 거 있지? 아니 둘째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걸 놔둬야지 왜 치워? 새로 사려면 돈이 얼만데."

마음의 댓글: 계획에도 없는 잠재적 둘째를 위해 쌓아두기엔 집이 좁네요. 아이 클수록 장난감이며 교구 덩치도 점점 커지는데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잖아요.

"얼마 전에 우리 애가 퇴근해 들어오는데 배가 엄청 고팠다는 거야. 그런데 집에 먹을 것 하나가 없어서 며느리 올 때까지 쫄쫄 굶고 기다렸다는 거 있지? 남편보다 늦게 퇴근해서는 밥하기 귀찮다고 배달음식이나 시켜주고. 그럼 남자가 집에 들어오고 싶겠냐고."

마음의 댓글: 아드님이 신체 건장한 성인 남성이시죠? 만 3세인 제 아들은 배고프면 냉장고 열고 간식 꺼내 먹는데요. 제삼자가 섭식을 챙겨주지 않아 아드님이 쫄쫄 굶는다면 생존욕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자기 며느리는 맞벌이라도 하지. 우리 애는 집에서 애만 보잖아. 얼마나 됐다고 벌써 몸이 '투실투실'해졌다니까."

마음의 댓글: 산후 비만은 단순히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에요. 처녀 때 즐겨 입던 스키니진, 맵시 좋은 원피스가 더 이상 내 옷이 아닐 때 얼마나 속상한지요. 세상에 못나지고 싶은 여자는 없잖아요.

이밖에도 장을 보다 의견차이가 벌어졌는데 건방지게 어른을 이기려 든다거나 지나치게 깔끔해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는 '며느리1', 반대로 너무 지저분해 집을 돼지우리처럼 늘어놓는 '며느리2'의 우열을 가려보려는 노력 등등 '아들의 여자'를 향한 성토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양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 것은 빵빵한 에어컨 때문도, 방금까지 콜라에 들었던 얼음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어서만도 아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답 없는 충돌을 그린 주부 취향 드라마들이 '하이퍼 리얼리즘'의 산물임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시어머니도 어디선가 나의 단점을 나노단위로 분석해 지인들과 공유할지 모른다는 찝찝함?

여사님들은 누군가 그들의 대화에 대단히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내 존재는 안중에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괜히 어깨가 굽고 숨고 싶어졌다. 못난이처럼.

어느새 듣기 불편해져버린 여사님들의 수다에는 참으로 평범하고 옳은 전제가 깔려 있었다.

"착하고 잘났으며 귀한 우리 아들."

나 역시 아들 가진 엄마이고 배 아파 낳아 열심히 키운 자식에 대한 무한애정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 다만 그 아들이 장성해 결혼을 하고 새 가족구성원이 된 며느리에게는 어쩌면 막연한 부담이며 두려운 대상이 되기도 하는 그런 것.

추석이 일주일도 안 남은 가운데 올해도 며느리들의 신세한탄은 명절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재가공 되고 있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당했던 과거에 비해 공공연히 설움을 토로하고 서로의 험담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변한 세태의 방증일 것이다.

다만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소모적인 뒷담화와 일방적인 몰이해는 이날처럼 여전히 일상 곳곳에서 버젓이 목격되고 있다.

지금은 내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과 양보를 강요하는 그때는 틀리다. 심지어 자녀의 배우자를 남들 앞에서 '후려치는' 비겁함까지 더해.

꼬꼬마 남매를 키우는 30대의 내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의 의미를 언제까지나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적어도 과거보다는 오늘, 그리고 내일이 더 나아야 한다는 건 상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