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아내는 자두를 아주 좋아한다. 오죽하면 자두귀신이라는 별명을 가졌을까. 여름 한 철 동안 서너 박스는 거뜬히 먹는 것 같다. 길을 가다가 자두를 파는 가게가 눈에 띄면 어김없이 한 봉지를 사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습관이 됐다.
보통 6월부터 자두를 사 먹을 수 있다. 계절 초기에 나오는 자두는 크기가 아주 작다. 8월인 지금은 초기에 나오는 씨알보다 몇 배나 큰 자두가 나온다. 아내는 당연히 커다란 자두를 더 맛있어 한다.
아내의 표현을 빌자면, 자두는 모두 맛있지만 특히 끝무렵에 나오는 사과 크기 자두가 최고의 맛이란다.
출하시기에 따라 자두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지금처럼 큰 자두가 나올 때면 계절의 초기보다 훨씬 더 자주 자두를 사고, 아내의 입에서는 자두가 떨어질 날이 없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자두를 사다 나르는 내 마음도 흐뭇하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목표로 살아간다. 물론 행복의 조건을 어디다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궁극적으로 행복이란 것이 본질적인 요소임은 부정할 수 없는 듯 하다.
행복이란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자두처럼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가끔씩 아주 큰 행복을 느꼈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어체의 관습적인 표현일 뿐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큰 행복, 작은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행복하다는 감정이 전부인 것이다.
큰 행복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주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지금이 다소 힘들고 괴롭지만, 먼 훗날 큰 행복을 위해 꾹 참고 살아간다. 성공을 위해 앞만 보며 뛰어가는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자신이 생각했던 큰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지나온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무엇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살았는가 하는 생각에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
행복이란 것에 크기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또 한 가지 생각은 자신이 가진 행복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그것에 비해 작다고 느끼는 상대적 빈곤감이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타인을 의식한다.
자신에게 온 행복과 타인의 그것을 비교하기 때문에 실제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예다.
행복에는 크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부터 큰 행복과 작은 행복을 굳이 따지지 말기로 하자. 여기에 공감하기만 하면, 이제부터는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자두의 크기가 모두 일정하다면, 자두를 많이 먹는 사람이 장땡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의 크기가 모두 똑같다면, 얼마만큼 행복을 많이 가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 순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삶을 이룰 수 있다.
더 큰 행복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으며 지금 내 곁에 있는 행복을 무시하거나 떨쳐버리지 말고 손만 뻗으면 닿을 행복을 모조리 챙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곁에 있는 가족들을 보며 행복할 수 있고, 양치질을 하면서 입가에 흘러나오는 거품을 보면서도 씨익 웃을 수 있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맑은 햇살을 보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행복이며, 먹고 입고 즐길 수 있음이 모두 행복일 수 있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모든 것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결심했던 그 시절을 돌이키면,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벅찬 행복인지 모른다.
어느 책에서나 한결같이 말한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런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어온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까?" 그러면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지금 행복하면 됩니다."
이은대 작가 /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최고다 내 인생> 등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