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대우조선해양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큰 산불로 번지는 가운데 금융권이 조선업 여신을 회수하려는 분위기가 감지돼 업계가 노심초사하고 있다. 더욱이 시중은행들이 RG(선수금환급보증) 발급을 꺼리는 통에 겨우 길이 트인 신규 수주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앞선다.
지난달 15일 감사원은 '산업은행의 대우조선해양 관리실태' 감사보고서를 발표해 파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특히 감사원은 산업은행이 스스로 도입한 '재무이상치 분석시스템'을 단 한 번도 대우조선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하며, 산업은행이 대우조선의 부실위험 가능성을 분명히 인지했으면서도 눈감았다고 지적했다.
산업은행은 이런 비판에 대해 조선업계의 관행인 '턴키'와 '헤비테일' 계약방식을 들며 관리감독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실제로 조선업계에 자금 유동성이 악화된 원인으로 계약방식의 취약성이 여러 차례 지적돼 왔다.
턴키 계약방식은 조선업계뿐 아니라 건설 등 기술을 보유한 업계에서 쓰이는 계약 방식으로, 시공업자가 해당 공사에 대한 △재원 조달 △설계 및 시공 △운전 등 모든 서비스를 발주자를 위해 제공하는 방식을 뜻한다. 열쇠만 돌리면 작동이 가능한 상태로 인도한다 해서 해당 이름이 붙었다.
관계자들은 해양플랜트 프로젝트가 조선업계의 희망이라고 여겼던 지난 2010년대 초반 이미 현재 상황은 예약된 수순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당시 국내 조선사는 해양플랜트 설계에 대한 아무 지식도 전문가도 없는 상태였는데 막대한 수주 규모에 눈이 멀어서 턴키 계약을 체결한 데다 지나친 저가 수주로 선주만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
아울러 헤비테일 방식 역시 조선업계의 유동성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기존에는 선박건조 과정에서 △계약 △스틸 커팅 △탑재 △진수 △인도 다섯 단계마다 균등한 양의 중도금을 지불하는 '스탠다드' 계약이 관례였다. 그러나 수주 경쟁이 치열해지고 발주사의 힘이 강해지면서 선수금 및 중도금을 10%, 심하면 5%까지 줄이고 마지막 인도가 끝난 후에 총 금액의 60~80%를 건네받는 헤비테일 계약이 일반화됐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이 분식회계 가능성 더 높다?
이에 조선사들은 당장 공사비를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하는 자금 압박이 심해졌을 뿐 아니라 인도가 지연되면 인도금도 깎이는 경우가 많아 이중으로 시달리게 됐다. 조선사가 기한 내 맞추지 못해 인도가 지연돼는 경우뿐 아니라, 발주사가 부도가 나거나 일방적으로 인도를 거부하는 경우에도 돈을 못 받기는 마찬가지인 것.
조선업은 수주 계약 이후 3~5년이 걸리는 장기 계약 형태다. 선박 건조기간이 길어 실제 현금 흐름이 장부에 기록되는 현금 기록과 다르다고 해도 쉽사리 알아채기 힘들다. 대우조선이 그동안 공사대금을 지급받기 전 미청구공사의 공사원가를 낮추고 매출액을 부풀리는 등 분식회계를 해온 것도 바로 이런 기록상 취약점을 이용했다.
정계와 검찰 측에서는 대우조선뿐 아니라 업계 전반적으로 비슷한 형식의 분식회계가 자행됐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달 초에는 정유섭 새누리당 의원이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서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보다 분식회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요지로 발언했다.
대우조선 부실의 원인으로 산업은행이 지목되면서 다른 시중은행들도 조선업 관련에서 발을 빼고 남은 여신을 회수하려는 분위기다. 신한은행과 국민은행 등 삼성중공업 대출을 하고 있는 은행들이 만기를 3개월만 연장한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당장 대출을 회수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며 "단기 연장을 한 것은 자구안 이행을 얼마나 철저하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의지로 해석해 달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조선업계가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하지만 보통 기업대출은 1년씩 연장되는데 3개월만 연장하면서 은행이 조선업계 대출을 회수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금융업계에서는 턴키 방식이나 헤비테일 계약 등 부실이 확인된 계약 방식이 계속 유지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심각한 수주절벽에 빠진 현재 발주사가 헤비테일 계약을 요구할 때 조선사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 비리의 핵으로 거론되면서 다른 시중은행들도 불똥이 튈까 봐 쉽사리 조선업을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토로했다.
이런 분위기가 시중은행들의 RG 발급 보류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자구안 승인도 이뤄졌고 회계법인의 감사도 받았는데 은행에서 움직이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상반기 내내 수주가 없었던 삼성중공업은 얼마 전 하반기 대형 수주 가능성을 예고한 상태. 현대중공업 역시 극심한 수주가뭄 속에서도 꾸준히 수주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은행이 RG 발급을 거부하면 계약이 이뤄질 수 없다.
금융당국과 조선업계에서는 기업의 원활한 구조조정을 위해서라도 이 같은 악순환을 끊고 시중은행에서 기업들이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