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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엄마 희로애락] '자수성가 멸종'이 워킹맘에 미치는 영향

21세 여대생의 창업 성공담은 왜 불편했나

이수영 기자 기자  2016.06.15 13: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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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지난달 세 번째 생일을 맞은 첫째는 말이 느리다. 30개월을 넘겨서도 완전한 문장이 아닌 단어만으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올해 초 어린이집에서 조심스럽게 언어치료를 권할 정도였다.

아이는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졌다. 말문만 제대로 트이면 훨씬 차분해진다며 담임교사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경험담을 풀어놓았지만, 그럼에도 치료를 받으러 가는 길은 망설여졌다.

내 자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함과 동시에 '엄마노릇'을 제대로 못한 책임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 옹알대기만 하던 소리가 제법 말처럼 들리고 구사하는 단어 수도 많아지면서 한시름 덜었으니 다행이다. 여기에 '안 돼' '아니야'로 뺀질거리는 미운 네 살로의 진화는 덤이지만.

육아에서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다양해야 하는지는 말을 꺼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요즘에는 부모 역할에 매몰돼 지나친 부담이나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오히려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모두 고마운 도움말이며 위안이 되지만 사실 부모로서의 책임과 부담이 가벼워질리는 없다는 게 함정이다.

첫째를 갖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에 울적할 때면 친정엄마는 "낳아 놓으면 알아서 커. 너도 그랬어"라고 하셨다. 하지만 호소남매 육아에 반강제로 동참한지 만 3년이 넘어가면서 그 주장을 철회하셨다.

"다른 엄마들이 얼마나 극성인데 너 피곤하다고 애를 방치하니. 요즘 애들은 부모가 만드는 거야."

나 역시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수긍한다. 지금이야 재택근무를 하지만 과거 출퇴근 전철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내 한 몸 누이기 바빴다. 큰애 말문이 늦게 트인 것도 그때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한 영향이 클 것이다.

알고 있음에도 생계형 워킹맘에 가까운 나는 여전히 호소남매에게 100% 온전한 관심을 쏟지 못하고 있다. 내년이면 전세보증금도 올려줘야 하고 당장 두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놀게 하는데 들어가는 생활비가 빠듯한 상황에서 일을 놓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솔직히 내게 있어 경제적 궁핍은 커리어의 상실보다 훨씬 더 무섭고 암담한 문제다. 사실상 멸종한 '자수성가'와 굳어진 '수저계급론', 여기에 "요즘 애들은 부모가 만든다"는 책망이 더해지면 공포는 배가된다.

며칠 전 스물한 살 여대생이 디저트 가게를 열어 7년 동안 실패를 거듭한 끝에 대박을 터트린 성공스토리가 포털 메인화면에 박혔다. 한 조각에 9000원 정도하는 고급 케이크 전문점인데 연 매출이 무려 230억원에 달할 만큼 인기라 한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여성이 수백억대 사업가라니. 심지어 학업을 다 마치지도 않고 창업에 뛰어들어 자수성가했다니 대단하다 싶었다. 그런데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읽다 실소가 터졌다.

'국가과학장학생 자격으로 나오는 장학금 1000만원, 주식 처분금 3000만원, 7살 때부터 14년 동안 차곡차곡 모았던 세뱃돈과 용돈 4000만원이 자본금이었다. (가게가 망하기 직전이었지만) 지인과 금융권에서 2억원을 빌려 2호점을 냈다.'

학교 다니라고 준 국가장학금을 창업 자본으로 유용한 것은 둘째 치고 대학생이 3000만원어치 주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뿐 아니라 14년 동안 용돈으로 모았다는 4000만원의 존재 역시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다. 계산해보면 연 수익 10% 기준으로 매달 20만원 이상 저축한 셈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주인공의 아버지는 인천에서 제법 유명한 건설사 대표며 첫 매장이 입점한 빌딩은 부친 소유다. 또 디저트가게라는 창업아이템 역시 유명 맛집에 일가견이 있는 승무원 출신 어머니와의 여행 경험을 살린 것이란다.

처음부터 시작점이 다른 사람을 '자수성가'의 전형이라며 치켜세우고 대중의 박탈감을 자극하는 식의 마케팅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반응은 최근 허탈함에서 분노로 번지는 분위기다. 진정한 의미의 자수성가는 멸종 직전이며 현실은 '맨주먹 코스프레'에 능숙한 금수저의 자아도취에 가까운 탓이다.

매달 생활비와 전세금을 목표로 일을 놓을 수 없는 생계형 직장인에게 양육자로서의 책임은 부담이 되기 십상이다. 상당수 부모들이 아이들과의 소중한 시간마저 쪼개야 할 만큼 여유롭지 못한 처지임에도 이들의 좌절을 부추기는 작태는 사회 곳곳에 만연하다.

부담과 죄책감을 내려놓으라며 스스로 어깨를 토닥이지만 애초에 내 아이의 미래를 두고 불안함을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른이 되는 것이고, 그만큼 차가운 현실에 내 자식보다 먼저 맨몸으로 부딪쳐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이는 낳으면 알아서 큰다"며 출산을 권한다면 일단 여기서 화제를 돌려 현재 자신의 처지에 맞춰 신중히 고심하시라. 과거 드라마 제목처럼 '상속자가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면 요즘 부모는 '수저의 부담'을 버티고, 나아가 넘어서야 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