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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철의 여정] "홀로 있어 외롭지 않다"

정보철 칼럼니스트 기자  2016.04.20 11: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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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삶에 대하는 태도가 격정적이고 운명에 열광하는 이들은 결혼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삶은 시적인 분위기속에서 이뤄진다. 삶을 떠도는 사람들이다.

반면 결혼을 꼭 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산문적인 분위기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안정적이고 완결적인 삶을 원하는 이들이다. 정착에서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결혼이 인간의 관습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성인으로 살아가는 존재로서 하나의 선택사항일 뿐이다. 허나 결혼여부의 선택에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숨겨져 있다.

어떤 상황에서 결혼을 선택할 것인지의 여부다.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넘어가는 사안이지만 상황의 문제는 의외로 간단치 않다. 쉽게 인정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대표작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노인의 고독에서 찾아내야할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될 사람의 가르는 상황 말이다. 노인과 바다를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 40이라는 미묘한 숫자가 나온다.

"노인은 오늘까지 84일째나 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처음 40일 동안은 그래도 한 소년이 노인과 함께 있어 주었다. 그러나 40일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것을 보자… 소년은 부모가 하라는 대로 다른 배에 옮겨 탈 수밖에 없었다."

40일 동안은 노인과 소년은 같이 있었다. 40일이 지나고 나서는 노인은 홀로 고기 잡으러 바다로 나가야 했다. 노인은 허나 외롭지는 않았다. 외로웠다고 생각했으면 더 이상 바다로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려 44일 동안이나 홀로 막막한 바다로 나갔을 리 만무했다.

40이라는 숫자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과 후, 흑과 백, 어둠과 밝음, 미성숙과 성숙의 교차지점에서 우뚝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 같은 존재가 40이라는 숫자다.

성경에는 선지자들이 홀로 지낸다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간, 예수는 40일간 광야에서 홀로 지냈다. 어린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뒤 갖은 고생 끝에 40년 만에 왕위에 올랐다. 이런 실례를 생각하다 보면 40이라는 숫자가 주는 묘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40이란 숫자는 위대한 철학책에도 등장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로 인해 되살아난 선지자 차라투스트라는 홀로 산에 들어가 사색을 하다가 40살이 돼 산에서 내려온다. 사람들에게 깨달은 것은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공자는 나이 40에 모든 것에 흔들리지 않고 우뚝 선다고 했다. 일명 '불혹'의 경지이다. 4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이다. 전적인 깨달음, 존재의 거듭남을 상징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 역시 40일을 기준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한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둘이 있어서 외롭거나, 혼자 있어 더욱 외롭지 않은 상황으로 차원 이동한 것이다. 외로움과 홀로의 차원이다. 외로움과 홀로는 동의어가 아니다. 전혀 다른 말이다.

'노인과 바다'는 외로움과 홀로의 차원을 적절하게 다루고 있다. '노인과 바다'는 노인과 소년, 그리고 노인이 잡은 거대한 청새치가 전체 구도를 이끌고 있다.

'산티아고'란 노인의 이름은 때때로 나오나 소년의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마놀린'이라는 이름이 두 번 나올 따름이다. '노인'과 '소년'이라는 보통명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과 형용사가 극도로 생략된 간결한 문장을 접하다보면 누구나 고독하다는 뉘앙스를 받게 된다.

허나 노인은 결코 외로워하지 않는다. 아니, 외로울 수 없다. 고기잡이 나선지 40일이 지나고 그 이후 44일 동안 홀로 바다에 나가지만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건강한 삶을 누리기 때문이다.

건강한 삶이란 어느 상황에서든 자신의 생각, 삶의 철학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 노인은 단지 돈을 위해서 고기잡이에 매달리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오직 돈이라는 실리를 쫓아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는 오직 살기 위해서, 그리고 고기를 팔아 음식을 사려고 이 물고기를 죽인 건 아니야'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너는 긍지를 살리기 위해서 고기를 죽였어. 너는 어부니까. 너는 고기가 살아있을 적에도 사랑했고, 그 후에도 사랑했지. 네가 그것을 사랑한다면 죽이는 게 죄가 되지 않아. 아니, 어쩌면 죄보다 더한 것일까?'"

노인의 긍지는 자유다. 돈이나 명예, 탐욕 등 외적인 것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자유는 욕망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자신의 존재에 중심을 두는 사람에게만 그 환희에 찬 속내를 보여준다.

그 속내에는 생명이 넘치는 삶, 생생한 삶, 결국에는 위험한 삶만이 존재한다. 자유에는 안정이 없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위험하게 보일 수도 있다. 산티아고 노인처럼 끊임없이 모험 속으로 뛰어드는 자만이 자유를 적극적으로 누릴 수 있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무엇을 위한 자유라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자유, 소극적 자유는 의미가 없다.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삶을 위한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이다.

자유와 홀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홀로 있음에 자유가 있다. 주체적인 삶이 가능한 진정한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외로움 속에는 자유가 없고 속박이 있다. 의지와 의존만이 난무한다.

외로움과 홀로 있음은 동의어가 아니다. 홀로 있는 것을 외로움으로 오해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 돼버린다. 홀로와 어울리는 단어는 아름다움, 숭고, 전체 성숙 현존 지혜 축제 등이다.

외로움은 불안 타자 추함 구속 조건 소극적 불완전 슬픔 어둠 방황 불행 외부 빈약 공허 의지 분리 외면 빈곤 등이다. 홀로는 긍정적인 것이고, 외로움은 부정적인 것이다.

홀로는 밝음이다. 훤히 빛나는 집안이다. 외로움은 어둠이다. 깜깜한 집안에서 누군가 들어와 촛불을 밝혀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의 시작은 고기잡이 나선지 40일 이후의 상황부터 시작된다. 40을 기준으로 철저히 홀로된 삶을 살아가는 노인을 조명하고 있다. 그 이전의 일들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 헤밍웨이의 잠재된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의 숨어 있는 의도는 노인의 생각에서 단편적이지만 그 편린을 찾을 수 있다. '라 마르', '엘 마르'라는 말이다.

"노인은 항상 바다를 '라 마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바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을 때 쓰는 스페인 말이다.

그러나 젊은 어부들, 특히 낚싯줄을 뜨게 하려고 고무 부이를 사용하거나 상어의 간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모터보트를 사들인 사람들은 바다를 남성으로서 '엘 마르'라고 불렀다. 그들은 바다를 마치 투쟁의 대상이나 일터, 혹은 적으로까지 생각하며 그렇게 불러왔다."

라마르와 엘마르는 바다를 똑같이 지칭하지만 바다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용어다. 라마르는 바다와 하나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엘마르는 바다를 낯선 타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정반대되는 젊은 어부들을 모습을 '엘 마르'라는 단어로 함축해 설명했다. 이들 물질만능주의자들은 남성용정관사를 써서 바다를 엘 마르라고 부른다. 바다와 함께 한다는 의식이 없이 바다를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반면 노인은 바다를 존중하고 바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잡는 고기마저 강한 유대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를 씨름하면서 혼자 생각한다.

"저 고기가 나를 실제의 나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으로 알게 해야지. 또 그렇게 될 테고, 제가 가진 것 전부를 가지고 나의 의지와 지혜에 맞서는 저 고기가 되어보고도 싶구나."

잡으려는 고기가 되고 싶다는, 바다와 하나라는 생각을 가진 노인은 44일 동안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바다에 홀로 나가지만 외로워하지 않는다. 노인은 바다와 하나가 돼서 타인이 전혀 필요 없는, 그래서 전혀 외롭지 않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구름이 피어난 그 아래로는 물오리 떼가 그 자태를 나타냈다가 흩어지고, 다시 모습을 나타내곤 하였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 전과 달리 바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은 타인을 그리워하는 또는 굶주려하는 병이다. 외로운 자는 자기 자신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모든 게 공허할 따름이다. 자신의 모든 삶들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떠한 관계 속으로 빠져든다 해도 외로움은 어찌할 수 없다. '모든 존재는 홀로 태어나 홀로 죽어간다'는 근본에 어긋나는 관계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외로움과 홀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외로움을 홀로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외로움은 타인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고, 홀로는 타인이 필요치 않은 전체다. 전체는 외로울 리 없다. 부분만이 외롭다.

홀로 그 자체가 모든 것이다. 홀로(alone) 있다는 것은 모두가 하나(all one)라는 뜻이다. 홀로 있음에는 나와 주변사람 그리고 세상이 모두 가 연결되고 하나가 된다. 영적 능력이 뛰어난 아메리칸 인디언은 인사말은 '미타쿠야 오야신'이다.

모든 게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구름, 해님, 달님, 시냇물, 들소, 꽃, 나무, 바람, 바위 등 모든 만물은 우리와 하나라는 존재론적 언어이다.

'노인과 바다'를 보면 외롭고 늙은 노인이 그려지지 않는다. 살점이 다 떨어져 간 청새치를 끌고 왔지만, 상품성이 전혀 없는 고기를 잡아왔지만, 성과 없이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돌아왔지만 노인은 오히려 건강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외로워하지 않고 홀로 있음에 빛나는 것이다.

"그놈들이 나를 이겼단다, 마놀린, 정말 나를 이겼어."

"그놈한테 진 건 아니죠. 그 고기한테 말이예요."

"암, 그렇고말고, 내가 놈들에게 진 것은 그 다음이었지."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다는 철학을 실천하는 노인과 소년이 주고받는 말이다. 아름다운 대화다. 어떻게 전체가 패배할 수 있단 말인가. 부분만이 패배하는 것이다.

홀로 있음은 전체이다. 전체만이 온전하다.

서두로 돌아가자. 두 종류의 사랑이 있다. 외로워서 하는 사랑과 홀로 있음의 차원에서 하는 사랑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외로워서 사랑을 찾는다. 주변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외로움을 잊으려한다. 허나 이것은 일시적인 환상이다. 어떻게 부분이 합쳐서 전체성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외로워서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홀로 있음의 차원에서 하는 사랑은 다르다. 내적으로 충만한 존재끼리의 교류는 진정성으로 하나가 된다. 엄청난 합일이다. 전체가 전체를 도와 더욱 빛나는 전체가 되는 것이다.

사랑과 결혼은 물론 다를 수 있다. 결혼을 하나의 단순한 관습으로 여길 때 홀로차원과 외로운 차원의 구분은 그리 중요시되지 않을 수 있다. 허나 외로움이 아우성치는 이 시대에 홀로차원의 사랑과 결혼이 곰곰이 생각해볼 가치는 있다. 한폭의 동양화, 여백이 풍부한 그림을 보는듯한 시가 있다.

산에는 새한마리 날지 않고/길에는 사람의 발길 끊어졌는데/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홀로/눈보라 치는 강에 낚시 드리웠다.

중국 당나라 시인 유종원은 강설(江雪)을 노래했다. 눈이 내리는 강에서 홀로 낚시를 하는 노인을 담담하게 그렸다. 사람 흔적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외딴 강가의 풍경에서 결코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외로움 대신 자연과 하나가 된 노인의 존재 그 자체가 그려지는 것이다. 전체와 하나가 된 홀로는 결코 외롭지 않은 것이다. 강설의 노인과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이 겹쳐 떠오르는 것은 외로워서가 결코 아니다.

정보철 칼럼니스트·이니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