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당 대표직을 내려놓겠다고 14일 오전 발표했다. 총선 후보 공천 과정에서 '옥새 파동'을 일으키는 등 존재감을 과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온 2선 후퇴 선언이다. 새누리당 비박(非朴·비박근혜)계 의원 50여명을 서울 강서구 한 식당으로 초청, 비공개 회동을 가지면서 "살아 돌아오라"고 주문한 지 두달여 만이다.
김 대표는 13일 치러진 20대 총선의 전면에 섰다. 새누리당이 145석가량을 차지하거나 그 이상을 거둘 경우 그가 거둘 정치적 과실을 저울질하는 분석이 여럿 나왔다. 하지만 300석의 과반커녕 제1당 자리마저 야권에 내주는 초라학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이한구 공천관리윈원회 위위원장 등 여러 갈등 요소와 각을 세우면서 총선을 치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고비 때마다 옥새 파동, 탈당파 지역구 무공천 전략을 밀어붙이는 등 나름대로 신념을 관철시켰다. 또 지역구에 내려가는 것으로 항의 표시를 하고 영도다리를 걸으면서 고뇌하는 이미지를 과시했다.
그러나 이 같은 모든 상황은 '김무성 정치'의 약진 거름으로 쓰이지는 못했다. 결국 '인생 짤(평생을 두고 가장 잘 찍혔다고 이야기할 만한 사진)'을 건지는 데 그쳤다는 풀이마저 나온다.
다시 시계를 앞으로 돌려 1월 말 비박계 저녁 회동으로 돌아가면 그의 모습은 '계파 수장'으로서의 욕심이 없지 않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이 같은 비박계 챙기기는 이명박 대통령 시절 당시 친박 공천학살 뒤 박근혜 의원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분개하면서 계파 문제를 공식화한 상황과 유사한 이미지다.
이 같은 상황은 이른바 친박연대와 무소속 친박연대 등 특정인 브랜드를 딴 정치세력화가 이뤄지는 파란을 성사시키기도 했다(김 대표 역시 이 같은 상황에서 당시 부산지역에서 총선을 치러 당선된 인물 중 하나다).
김 전 대표는 늘 '박근혜 키워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박 대통령과 가까운 정치인으로, 또 그 이후에는 탈박 정치인으로 거론됐다. '자기 정치'를 하고 싶어한다는 점에서 거리를 두게 됐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하지만 이후에는 '비박'이라는 또 다른 넓은 카테고리의 범주를 끝내 넘어서는 자체 브랜드화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는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정치에 입문한 그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애라는 배경으로 정치 이력을 쌓아온 박 대통령과의 사이에 완전한 화학적 결합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점만으로는 설명이 온전하지 않다.
그는 이른바 '30시간 룰'에 발목을 잡혔다. 최근에도 공천을 둘러싼 그동안의 당내 갈등에 대해 사과하며 "싸워서 이기는 것은 군인정신이다. 정치는 지면서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또 "대차게 나가라. 끝까지 밀어붙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말에 넘어가면 큰일난다. 정치는 협상과 타협이다. 국민과 조직을 위해 타협한 것이며 비굴한 것이 아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내놓기도 했다.
이는 긴급 기자회견까지 열어 "최고위 의결을 받지 못한 선거구의 추인을 끝까지 거부하겠다"고 한 것을 번복하는 등 혼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했다.
더욱이 문제 지역구 가운데 6곳 중 3곳만 추인하는 등 오락가락 행보까지 보였다. 이는 김 대표가 자신이 말한 바를 30시간이 안돼 철회한다는 이른바 '30시간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기존 '심증'을 '확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동시에,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게 아니냐는 논란까지 낳았다.
아울러 유승민 의원 지역구 등 일부에만 무공천 상황을 만들어 버림으로써 '마음의 빚'을 지우는 한편, 일부에서는 '사고 지역구'를 만드는 초강수를 강행함으로써 자기 위상만 최대치로 끌어올렸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결국 당내 경선 패배 후의 승복 행보나 '대화가 안 되는' 단점을 가진 박 전 대통령과 대비해서도 더 큰 정치적 위상을 만들어 내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 사람 챙기기'만 부각된 채 총선을 맞은 셈이 됐다.
가장 어려운 정치 인생의 한 터널을 지나고 있는 '김무성 정치'의 부활 여부를 점치기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