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임대홍 대상 창업주가 5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임 창업주는 국산 조미료가 없던 시절 미원을 개발해 한국 식품산업을 이끈 원로 경제인이다.
순수 국내자본과 기술로 설립한 종합식품회사 ㈜대상. 옛날 시골 어른들이 커피에 미원을 타 먹을 정도로 우리 입맛에 딱 맞았던 이 조미료는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자의 연구정신이 창조한 산물이다.
임대홍 창업주는 1956년 1월, 대상의 전신인 동아화성공업㈜를 설립해 국산 1호 조미료 미원이라는 브랜드로 국내 조미료 시장을 평정했다.
1920년 전북 정읍시 상교동에서 아버지 임종구씨와 어머니 김순례씨 사이에서 5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940년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학과 졸업 후 고창군청 산업과 기수로 발령받으며 공무원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1945년 해방으로 도청 공무원 일을 하게 됐으나 자신의 적성에 맞는 축산가공업에 뛰어들기로 하고 사표를 던진다.
이후 정읍시 신흥동에 피혁공장을 차렸으나 우후죽순 생겨난 경쟁자들로 공장에서 손을 뗐고 부산으로 내려가 대림상공을 설립한다. 축산자원이 풍부한 제주도에서 값싼 피혁과 육류를 가공해 부산에 보내는 방식으로 사업을 전개했지만 1948년 일어난 4·3 폭동으로 다져놓은 모든 기반을 버려야 했다.
이후 대전피혁에 입사, 본격적인 피혁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부산에 동아피혁과 남선피혁, 마산에 마산피혁, 청주에 청주피혁을 설립한데 이어 서울에도 대성피혁을 세워 전국 규모의 피혁사업을 펼쳤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해 '전쟁특수'로 사업번창의 기회를 얻게 됐다.
◆日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판을 치던 1950년대
전쟁 후 복구사업이 시작되면서 해외에서 들어온 나일론과 인조피혁에 큰 충격을 받은 임대홍 창업주는 동양교역이라는 회사를 세워 무역업에 뛰어들었고 일본과 홍콩을 쉴 새 없이 오가던 중 일본산 조미료 '아지노모토'를 접한다.
1950년대는 한국에서 '아지노모토'가 판을 치던 시기였다. 이에 반감을 가진 그는 태평양전쟁에 패한 일본 제품 수입 패지를 틈타 조미료를 직접 만들기로 작정하고 일본까지 건너간다.
1955년, 일본에서 어깨너머로 1년간 조미료 성분인 '글루타미산' 제조방법을 연구한 뒤 부산에 돌아와 동양교역과 대림상공을 해체한다. 이후 1956년 1월, 496㎡(150평) 규모의 조그만 조미료 공장 동아화성공업㈜을 설립하고 '하얀색 결정체'를 얻기 위해 연구에 매진한다.
수개월간의 노력 끝에 그는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추출한 잔재를 에너지원으로 발효시켜 글루타민산을 얻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염산을 분해할 때 생기는 산화부식을 막는 설비도 만들기 위해 우수한 돌을 찾아 밀고 깎으며 다듬은 끝에 대규모 생산이 가능한 석부도 완성한다.
그렇게 이 작은 공장에서 한국 최초의 조미료 '미원'이 탄생하게 됐다. 30여명 직원이 매월 500kg 조미료를 생산하는, 작은 규모였지만 당시 시장을 휘어잡던 일본 제품을 순식간에 몰아내고 1960년대 국산 조미료 대량 생산 시대가 개막된다.
1962년,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는 대표 제품인 미원과 같은 이름으로 사명을 변경한다. 1964년에는 전분 및 전분당 사업에 진출하고 1965년엔 미생물 발효법 개발, 1967년 미원 생산량 100t을 이루며 꾸준한 성장가도를 달린다. 1963년에는 제일제당에서 미풍을 생산하자 사운을 건 치열한 판촉 광고전을 벌이기도 했다.
순수 국내자본과 독자기술로 생산된 국산조미료 1호 '미원'이 국내 조미료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한 시기인 1970년 미원㈜과 서울미원㈜ 주식을 증권시장에 상장시키고 같은 해 10월 제9회 세계식품 콘테스트에서 최우수 조미료 금상도 수상한다.
1970년대에는 △호남식품 △한남화학 △내쇼날 합섬 △백광화학 △미원통상 △미원수산 △한국중앙기계 △미원중기 △미원교역 등을 설립했다.
◆고집 센 구두쇠, 사회환원은 아끼지 않았던 '은둔형 경영자'
'은둔형 경영자'로도 불렸던 임대홍 창업주는 경영뿐 아니라 연구가로도 인정받는 기업인이었다.
'연구광' 임대홍 창업주는 대상 설립 후 30년만인 1987년 장남인 창욱씨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고 일선에서 물러난 뒤 지병인 당뇨병과 싸우면서도 실험실 불을 끄지 않은 채 연구에 매진, 다양한 된장 제품 개발에 나섰다.
그는 재계에서 검소함으로 더 유명했다. 출장을 나가도 5만원 이상 숙소에는 묵지 않았고 열차도 새마을호는 타지 않았다. 승용차보다는 전철을 더 많이 이용했으며 구두도 평생 두 켤레 이상 함께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1971년 사재 10억원을 들여 장학재단을 만드는 등 사회환원에는 아낌없었다.
2005년 1월 부인 박하경 여사가 향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슬하에 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68)과 성욱 세원그룹 회장(50) 두 아들과 딸 경화씨를 뒀다.
유족들은 고인의 빈소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했지만 조용히 가족장으로만 치른다는 계획이다. 발인은 8일 오전 7시, 장지는 전라북도 정읍 선영이다. 유족으로는 임창욱 대상 명예회장과 임성욱 세원그룹 회장, 딸 임경화씨와 사위 김종의 백광산업 회장, 손녀 임세령, 임상민 대상 상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