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안중근은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광석동에서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 황해도의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성균관진사인 부친 안태훈과 조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나 부족함이 없던 안중근. 그는 왜 그런 편한 삶을 버리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부리를 겨눴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의 상황을 이해해야 가능하다.
당시 조선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위태로운 처지였다. 나라 밖으로는 동서양의 강대국들이 무력을 앞세워 틈만 나면 조선을 삼키려고 눈을 번뜩였고, 나라 안에서는 관리가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이 다반사여서 백성들이 마음 편히 생업이나 학업에 힘쓸 처지가 못됐다.
게다가 갑신정변, 청일전쟁, 을미사변, 러일전쟁 등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나면서 점차 국운이 기울고,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다.
이에 대해 안중근은 지식인이자 선각자로서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이를 타개하려면 백성들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먼저 택한 방법은 백성을 위한 계몽책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비를 모두 털어 삼흥학교를 세우는가 하면, 이후 천주교 계열의 돈의학교를 인수한다.
하지만 일본의 만행은 점점 극에 달해 가고 조선의 미래가 끝을 알 수 없는 벼랑 아래로 치닫게 되면서 식민주의라는 거대한 폭풍우에 휘말리자 계몽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해 의병운동을 전개한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었다. 이러한 그의 일련의 행보는 지식인이자 선각자로서 시대적 고뇌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방법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후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국내외 많은 사람들에게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독립운동가인 것이 그 근본적 이유겠지만, 단지 그것만이 그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안중근이라는 한 인격체에서 드러난 다채로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이들에게 깊은 존경을 불러온 것이다.
벗나래가 펴냈고, 가격은 1만5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