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남편을 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잠시도 남편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수시로 발작을 일으키는 남편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로 1년도 아닌 수년째, 여인은 남편의 병수발을 묵묵히 감내했다. 남들 같으면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이 의사에게 말했다.
"제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하루 40분이지만 자신만의 시간을 찾은 것이다. 집 근처에서 30분 동안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10분 이내에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온다. 40분은 자신이 없더라도 남편은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 시간이었다.
행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만든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사회적 평가로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 행복을 찾았다는 이야기. 행복에 대한 정의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진정한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고통이다. 생로병사로 일컬어지는 고통을 겪지 않은 삶은 없다. 인간관계의 고통도 만만치 않다. 그런 삶이 있다면 환상 속의 삶일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고통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삶 속에서 시시각각 드러나는 고통의 원인에는 '무지'와 '그릇된 욕망'이 있다. 이를테면 영원한 것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무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사랑, 영원한 약속, 영원한 돈, 영원한 권력 등은 인간의 삶 속에 있을 수가 없다. 아마 신들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유와 집착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욕망도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특히 돈에 대한 집착은 인간을 극단의 고통으로 몰고 가는 일이 허다하다. 고통은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잣대다. 행복하다가도 불행하고, 불행하다가도 행복해하는 것은 바로 고통의 농단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상태에서 인간의 마음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평정심'과 '생명력'이 바로 그것이다. 행복이라는 새의 왼쪽 날개는 평정심이고 오른쪽 날개는 생명력이다.
양 날개는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날기에는 버겁다. 평정심은 마음이 바람 없는 호수처럼 고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요하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의 철학자들도 이점에 주목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과정에서 발생한 동서양 융합문명인 헬레니즘 시대에 스토아학파가 강조한 '아파테이아'의 경지가 바로 그것이다.
감각적 경험을 중시한 에피쿠로스 학파의 '아타락시아' 역시 고요함, 즉 평정심을 말하는 것이다. 아파테이아나 아타락시아 모두 행복한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진정한 행복상태를 이끄는 또 다른 날개는 생명력이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는 생명력으로 넘쳐난다. 생명력이 넘친다는 말은 마음이 충만하다는 뜻이다. 마음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된다. 내가 세상이고, 세상이 나인 상태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세상을 온전하게 받아들인다.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기가 치솟는다. 또 생명력은 삶을 항상 새롭고 신선하게 만든다. '태양은 날마다 새롭다'는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경구가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 지내게 하라'는 성경 구절도 생명력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언급한 죽은 자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력이 없는 자들이다. 마음이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무감각하고 지루한 삶을 살아간다. 행복에 이르는 길을 전혀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진정한 행복은 외적 이득이 아니라 내적 만족에서 나온다. 내적 만족은 치열성을 요구하기에 행복해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행복의 요인으로 가장 과대평가하는 것이 돈과 같은 외적 조건이다. 그러나 외적 조건은 행복의 결과로 얻는 부산물일 따름일 뿐 행복을 떠받드는 지탱목은 되지 못한다. 외적으로 성공한 자들이 전혀 행복하지 않은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불행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외적 조건을 부단히 추구하면 된다.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도 모른 채 남들을 따라하는 건 쉬운 일이다. 인간의 마음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찾는다. 문제는 그 무엇인가를 모른다는 데 있다. 그냥 무작정 찾는 것이다.
돈과 힘, 지위 명예 등을 찾는다고 하지만, 작금의 현실만 보더라도 죽을 때가 가까운 80~90대의 재벌도, 70~80대의 노정치인도 그 무엇을 계속 찾고 있는 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무엇은 아마 안개 같은 것일 것이다. 모호하고 아리송하다. 그런 점에서 미국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행복추구권은 실망스럽다. '행복의 정복'을 쓴 영국의 철학자 버틀랜드 러셀은 행복은 추구할 대상도 정복할 대상도 아니라고 했다.
단지 내부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그것을 깨닫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곤 한다. 그 시행착오를 줄이는 일이 빨리 행복에 도달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 네 가지 행복의 아포리즘을 기억해보자.
첫째, 행복은 선택이다. 우리가 행복한 것은 행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불행 역시 마찬가지다. 불행을 선택했기에 불행한 것이다. 행복을 선택한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둘째, 행복은 배움이다.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마음이 끼치는 영향력을 배우고 긍정을 생활화해야 한다. 그런 다음 어려운 상황에서도 평상심을 회복하는 능력인 정서회복력과 불행한 상황을 딛고 일어서는 회복탄력성을 온몸으로 일깨워야 한다. 긍정마인드의 습관화는 평생을 걸쳐 일궈야 할 공부다.
셋째, 행복은 추구대상이 아니다. 행복 추구가 오히려 행복을 멀리하게 만든다. 행복을 추구하다가 오히려 불행으로 미끄러지는 경우가 많다. '월렌다 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월렌다는 최고의 고공 줄타기 선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실패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고 결국 실족사했다.
넷째, 남들도 똑같이 행복을 원한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자신의 행복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 함께 하자'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최근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서유럽이 적극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전향은 그들 자체의 행복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서두로 돌아가자. 여인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고 생명력으로 충만했다. 외적 조건에 흔들리지 않은 행복이 진정한 행복인 것이다.
그 여인은 고통을 스스로 최소화시켰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줬다. 그 여인의 말을 다시 한 번 읊어보자.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말을 상기해보자.
"제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요?"
여인을 보면 행복에 대한 확신이 선다. 그것은 행복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불행과 체념의 숙명에 익숙한 시야를 버리고 행복을 바라보는 시야를 선택하자. 뇌가 인식한 대로 세상은 만들어지니까.
행복하려고 노력하라. 행복해지겠다고 하는 순간 우리의 뇌는 신경회로가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대가 누구이든 간에 행복해지기를 결심하라. 주변 환경이 변하기를 기다리지 말라. 바로 지금 이 순간 결심하라. 혹 상황에 따라 당신의 행복이 달라진다면 행복에 맞게 상황을 변화시켜라.
프랑스 철학자 알랭의 '행복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행복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행복은 절대로 그 사람을 속이거나 피하지 않는다. 스스로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이를 만들어야 한다."
정보철 칼럼니스트·이니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