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아들? 아들들은 바빠서 여기 올 여가도 없어. 전화해서 할 말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몰라.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겠고,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 퍼질러 자빠져 있는 거야. 이래 가만히 있으면 죽을라는가 싶어서…"
현직 요양병원 의사 김진국이 쓴 '기억의 병: 사회문화 현상으로 본 치매'에 실린 한 노인의 말이다.
짧은 하소연 속에 우리 사회의 단면이 낱낱이 드러난다. 강요된 무한경쟁 속에서 먹고살기도 바쁜 사람들은 노인을 부양하기커녕, 안부를 주고받을 여유도 없고, 세대와 세대사이의 격차는 너무 벌어져 대화도 통하지 않는다.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할 일도 갈 곳도 잃은 노인들에게는 삶의 방향성이 없다.
그들의 남은 시간은 사회 구성원에게 부양 부담을 지게 하는 이영의 시간이 돼서 그저 흘러갈 뿐이다.
'기억의 병: 사회문화 현상으로 본 치매'는 이러한 세태를 속속들이 분석하면서, 나이듦이란 것이 사회문화적으로, 의학적으로, 가정 안에서, 또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한다.
신경과 전문의로 오랜 기간 재직한 저자 김진국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노인 문제의 안팎을 깊이 있고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노년층과 삶과 위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병 '치매'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깊이 탐구할뿐더러 한없이 벌어지는 세대 격차, 노년층의 노추(老醜)와 갑질 문화와 같은 복잡한 사회문제들을 명쾌하게 진단했다.
또한 나이듦의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 있는지, 사회는 어디로 나아가고 노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뚜렷한 성찰을 보여준다.
치매의 대표적인 증상은 잊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노인들이 기억하던 것, 관계 맺을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낮선 환경, 모르는 문화, 서먹한 사람들 사이에서 노인들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는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이든, 사회든, 모든 존재는 과거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변화 또 변화만을 외치며 과거를 부정하고 기억을 삭제해왔다.
불과 수십년 전 세대의 삶과 문화조차 어떤 것이었는지 깡그리 잊고 앞으로 달려가기만 바쁜 우리 사회야말로 '기억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은 돌아보게 한다. 이제는 잠시 멈춰 우리의 과거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와 닿는다.
시간여행에서 펴냈다. 312쪽, 가격은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