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경험한 임신과 출산, 육아에 한해서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창간한 지 11년 된 회사, 그것도 남녀 성비가 여성 쪽으로 기울어진 이곳에서 필자는 지난 6년여 동안 △유부녀 1호 △임산부 1호 △최초의 육아휴직 신청까지 밀어붙이며 광폭 행보했다.
필자를 모르모트 삼아 회사의 임산부 복지를 가늠할 동지들의 응원과 함께 2013년 늦은 봄 첫 출산을 했고 10개월 만에 복직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꽤 자신에 차 있었다. 불과 1년 만에 쭈뼛거리며 다시 육아휴직 신청서를 내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또 한 번의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내내 회사의 그 누구도 눈치를 주거나 압박하지 않았음에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기자로서 당당하게 육아휴직의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막상 필자 역시 평범한 직장인이고 팀의 일원이었다. 무엇보다 중간 연차 선배로서 후배들만 남기고 1년 가까이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아무도 지워주지 않은 마음의 짐을 스스로 짊어진 것이다.
'처음이 어렵지…'의 법칙은 이때부터 산산이 깨졌다. 과다출혈로 혈액 팩 4개를 먹어치운 두 번째 제왕절개는 차라리 배를 도려내고 싶을 정도의 통증과 짙은 흉터로 각인됐고 젖 빠는 것 말고는 당최 할 줄 아는 게 없는 핏덩이를 가슴에 붙이고 남는 건 체력 뿐인 세 살짜리 아들을 조련하며 정작 필자의 체력은 바닥을 쳤다.
무엇보다 큰 아이 때 가볍게 넘어간 육아 우울증이 심각했다. 부산 남자라 그런지 육아와 가사에는 그다지 관심 없는 남편은 눈치 없게도 셋째 타령을 하며 속을 긁었고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며 자존감이라는 게 뭔지도 아리송해졌다.
그중 가장 무서운 것은 다시 돌아갈 곳이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두 아이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것에 24시간이 모자라 내 의지로 머리를 굴릴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내 생리적 욕구를 채울 여유까지 앗아가 버린 아이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마치 꽉 막힌 터널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았다. 휴직이 끝나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체념이 기정사실로 굳어질 즈음이었다.
솔직히 개인적인, 또 암울한 푸념을 이렇게 늘어놓을 기회가 올 줄은 예상 못했다. 다만 숨넘어가게 힘들었던 지난 1년을 나름의 무용담으로 펼쳐낼 용기가 생겼다는 것은 방전됐던 마음이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다는 뜻이겠지.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그토록 원하던 복직에 성공했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들어올 땐 네 의지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의 마음으로 못난 후배를 잡아준 회사 선배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첫째인 아들은 혼자 변기도 쓸 줄 알고 제법 사람 구실을 할 정도로 컸고 핏덩이 딸내미는 최근 직립보행에 성공해 다음 달 첫 생일을 맞는다.
'그렇게 엄마가 된다'는 명제가 성립하기까지 드라마틱한 경험은 없었다. 그저 매일 밤 '엄마 품 쟁탈전'을 벌이며 아옹다옹하는 어린 남매의 옆을 지키면서 자연스럽게 엄마의 자리가 단단해진 것 같다.
모두 그렇게 엄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