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미 기자 기자 2016.01.20 15:32:47
[프라임경제] 한국노총이 '9·15 노사정 대타협' 파기를 선언하면서 정국이 노동개혁 격랑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대타협 이후 17년 만에 이뤄졌던 노사정 대타협은 물거품이 됐고, 여당은 한노총을 향해 민주노총 2중대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쏟아내는 것이다.
야당은 정부가 먼저 노사정 대타협을 위반했다고 지적하는 가운데 정부는 독자적인 노동개혁을 추진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한노총 파기 선언…17년 만에 이룬 노사정 대타협 물거품
김동만 한노총 위원장은 19일 기자회견을 열어 "9·15 노사정 합의가 정부·여당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혀 휴지조각이 됐고, 완전 파기돼 무효가 됐음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한노총은 정부·여당이 노사정 합의 다음 날인 지난해 9월16일 합의를 위반한 채 비정규직 양산법 등을 입법 발의하면서 처음부터 합의 파기의 길로 들어섰고, 노사정위원회의 역할과 존재를 부정했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노사와 충분히 협의하는 것처럼 합의한 양대 지침(일반해고·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도 지난해 12월30일 전문가 좌담회라는 형식을 빌려 언론에 협의 없이 발표했고, 노사정 합의문은 한낱 휴지조각이 돼버렸다는 것.
'일반해고'는 저성과자 해고를 말한다.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는 근로자에게 불리한 사규를 도입할 때 노조나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받도록 한 법규를 완화하는 것을 뜻한다.
앞서 한노총은 지난 11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양대 지침 관련, 정부가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촉구했으나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18일 기자간담회에서 "노사정이 만나서 협의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사실상 한노총의 제안을 거부했다.
한노총은 노사정 대타협 파기 선언에 따라 앞으로 '소송 투쟁'과 '총선 투쟁' 등 양대 투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이다.
한노총의 불참 선언으로 1998년 1월5일 출범한 노사정위원회는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됐다. 다만, 노사정위 '탈퇴'가 아닌 '불참'을 선언한 것을 두고 대화 가능성은 여전히 열린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시민단체 "대타협 파기 선언은 일자리 파탄 선언"
한노총의 노사정 대타협 파기 선언에 대해 청와대는 물론 정부·여당은 "국민과의 약속은 결코 파기될 수 없다"며 파상 공세를 펼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일 "지금 한쪽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시간을 끌고 가기에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도 어렵다"면서 "노사가 서로 양보하면서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금년에는 노동개혁을 반드시 완수하고 현장에 정착시킬 수 있도록 노사의 결단이 있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이날 열린 최고위원·중진연석회의에서 "한노총이 국민과의 약속인 노사정 합의를 파기하고, 대화도 단절하면서 노동개혁의 성공을 바라는 국민 여망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더해 "노동개혁의 목표는 청년 일자리창출,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 완화, 비정규직 고용 불안정 해소 등을 위한 것으로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용노동부는 "어려운 결단과 내홍 끝에 대타협 추인까지 이뤘던 한노총 지도부가 기득권에 매달리는 일부 강경파 연맹의 반발 때문에 금년 들어 더욱 어려워진 경제상황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적 대화를 박차고 나간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며 우리 국민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이날 노동시장개혁촉구운동본부, 노동개혁 청년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들도 한노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 청년대학생들과 시민사회는 기득권 사수를 위한 한노총의 뻔뻔한 행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함께 이 자리에 나왔다"며 "한국노총의 대타협 파기 선언은 일자리 파탄 선언"이라고 규탄했다.
이어 "한노총은 대타협에 합의해놓고도 노동개혁이 '쉬운 해고'를 위한 노동개악이고 500만 제조업 노동자들을 모두 비정규직으로 만드는 악법이라고 줄곧 반대해왔다"고 역설했다.
이들 단체는 계속해서 "하지만 노동개혁 입법안과 양대 지침 어디에도 그럴 가능성을 담고 있는 내용은 없다"면서 "노동개혁을 반대할 명분이 없으니 억지구호라도 만들어 국민들에게 겁을 주려는 심산인 것 같다"고 언급했다.
◆양대 지침 둘러싼 노동계 vs 정부 주장 엇갈려
한노총이 노사정 대타협 파탄을 선언한 직접적인 배경은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등 양대 지침을 둘러싼 노동계와 정부의 첨예한 대립이다.
'쉬운 해고'를 가능케 한다는 노동계의 주장과 '노동시장의 선진화'를 위해 필요하다는 정부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일반해고는 사용자가 근로자를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근로기준법 23조를 둘러싼 논쟁이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의 해고를 엄격하게 제한해 사측에서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는 방법은 '징계해고'와 '정리해고' 두 가지로 제한하고 있다. 일반해고는 이와 달리 미국이나 유럽처럼 저성과자나 근무태도가 불량한 직원을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갈수록 인력이 고령화하고 인건비 부담이 심해져 이를 요구하는 재계의 목소리에 부응한 조치다. 정부가 내놓은 초안에서는 일반해고가 가능한 대상을 '공정한 평가와 이를 위시한 재교육, 배치전환 등 기회를 줬음에도 업무능력 또는 성과 개선의 여지가 없거나, 업무의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는 근로자'로 규정했다.
정부는 합리적 기준과 명확한 절차를 갖춘 가이드라인은 해고와 관련된 노사 갈등을 예방하는 역할과 함께 부당해고 사례를 획기적으로 줄게 하고 정년 60세가 지켜질 수 있게 하는 안전장치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노동계는 일반해고가 도입되면 형식적인 재교육이나 전환배치 등을 한 후 단지 성과가 낮다는 이유로 해고하는 '쉬운 해고'를 가능케 하는 만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이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대한 양측의 시각 차이도 크다. 취업규칙은 채용, 인사, 해고 등과 관련된 사규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은 근로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간주되는 취업규칙 변경은 노조나 근로자 과반수 대표의 동의를 받도록 했다.
정부 초안에서는 판례 등에 근거해 근로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취업규칙 변경이라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변경의 효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정부는 사회통념상 합리성의 판단 기준으로 △근로자의 불이익 정도 △사용자 측의 변경 필요성 △변경된 취업규칙 내용의 적당성 △다른 근로조건의 개선 여부 △노동조합 등과의 충분한 협의 노력 △동종 사항에 관한 국내 일반적인 상황 등 여섯 가지를 제시했다.
이에 노동계는 취업규칙 변경요건을 완화할 경우 임금피크제 등 사측이 원하는 취업규칙을 마음대로 도입할 수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반면, 정부는 사회통념상 합리성의 판단 기준으로 여섯 가지의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 만큼, 사측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부 "대타협 충실히 이행…오히려 한노총이 부당"
노동개혁 법안 관련 한노총의 합의위반이라는 주장과 노사정 대타협 파기를 선언한 한노총이 오히려 부당하다는 정부의 주장도 맞서고 있다.
먼저 새누리당 입법안에 고령자, 고소득 전문직관리직, 뿌리산업(금형, 주조, 용접 등)에 대한 파견허용 확대와 파견·도급 구별기준 법률을 명시한 것을 두고 노동계는 제조업 직접 생산공정에 대한 법률상 파견허용 제외 원칙 훼손, 불법파견 합법화 우려를 들어 반대했다.
이에 정부는 입법권은 국회 고유권한이자 향후 입법과정에서 노사정 미합의 사항은 공익위원안과 노사정 의견을 참고해서 보완방안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또한 파견대상업무 확대와 관련, 제조업 직접 생산공정업무는 현행과 같이 원칙적으로 파견대상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는 해명이다.
이와 함께 개정안에서 고령자에 대한 파견대상업무 확대의 경우에도 파견절대금지업무와 제조업 생산 공정업무는 명시적으로 제외하며, 뿌리산업의 경우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큰 성장동력임에도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
이외에도 △근로기준법 △고용보험법 △산재보험법 등에 대해서도 노동계는 정부가 합의를 위반했다는 견해다.
이에 정부·여당은 국회 입법절차에 따라 우선 대타협 내용을 토대로 신속히 법안을 발의하고, 향후 노사정 추가 논의결과를 반영해 법안을 심의할 것임을 한노총에 충분히 설명해왔다고 맞섰다. 정부가 추진한 일련의 입법절차는 대타협 합의 내용을 충실하게 이행한 것이라는 부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