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현 기자 기자 2016.01.08 19:18:57
[프라임경제] 철강왕 카네기는 저녁이면 식구들이 모여 앉아 가죽 구두를 지어야 하는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형편에도 공부하는 걸 좋아해 전신 기술 등을 익혀 돈을 착실히 모았고 미국 대표 부호가 됐다.
카네기는 미국 철강 산업을 이끈 자산가다. 하지만 이외에도 재산을 기부한 이로도 기억된다. 카네기 공대(훗날의 카네기멜론대) 등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다.
박준선 전 의원도 덧신을 만들어 파는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랐다. 어렸을 때에는 '수사반장'을 좋아하던 평범한 소년이었으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과외는 꿈도 꿀 수 없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덧신 공장에서 식구들 모두 가업을 돕는 상황에서 책만 파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하루 4시간여만 자는 방법으로 절약한 시간을 모아 공부했다. 결국 당당히 서울대에 들어갔다. 이후 사법시험을 거쳐 검사로 일했다. 2000년 정인봉 당시 의원을 기소하면서 관심을 모으는 등 열정적으로 일했지만, 참여정부 시절 이른바 검찰개혁을 시도하면서 법무부와 검찰이 인사 갈등을 빚던 때 법복을 벗었다.
큰 키에 큰 목소리, 사람들과 말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시위를 주도하기에는 적합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대학 시절, 운동권의 영입 대상 1호로 선배들의 러브콜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정권 시절의 문제적 정치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대의에도 불구하고 운동권 논리에는 흔쾌히 동의할 수 없었다.
논쟁 끝에 결국 운동권 가담을 하지 않았던 그는 결국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을 통해 제도권 정치로 들어섰다. 결국은 정치 이슈에 발을 담글 것이라는 당시 선배들의 예상이 반은 맞은 셈이다.
그는 경기도 기흥(현재의 용인을)에서 출마,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어 이번 선거 준비 작업이 낯설지는 않다. 한나라당 공천제도개혁특별위원회 간사 등을 거치면서 정치 개혁에도 큰 관심을 가졌었다.
공천 갈등으로 정치 일선에서 한 걸음 떨어져 변호사 생활을 하던 그가 야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국회로 돌아가겠다는 각오를 한 이유는 뭘까? 경제법안 처리 지연 등 무책임한 정쟁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19대 국회에 책임을 느꼈기 때문으로 알려져있다.
이번에는 서울 동대문을이다. 이 지역구는 과거에도 그가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답십리초등학교, 전농중학교에 성동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동대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동대문의 아들'이다.
다만, 과거에는 홍준표 현 경남지사가 이 지역구 의원이어서 기흥에서 출마를 했던 것이다. 박 전 의원으로선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독학, 자수성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적지 않은 카네기처럼, 그도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다. 특히 돈을 크게 써야 하는 기형적 입시 제도가 다른 모든 부분을 집어삼켜 전인교육이 어려운 환경을 개선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과거 국회의원으로 일하던 때 '실용영어진흥특별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대입 시험에서 영어 과목을 제외해 사교육 열풍을 잠재우자는 그의 구상은 과격하다는 평도 없지 않았으나 진의는 주목을 끌었다.
국회의원 재임 시절 당시 지역구인 기흥에 소재한 신갈고에 인조잔디 운동장을 조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도 그가 임기 중 한 교육 관련 업적 중 주요 아이템으로 회자된다. 공부에 시달리는 학생들이 잠시라도 제대로 뛰어 놀 수 있도록 하고, 인근 주민들이 생활체육을 즐길 수 있는 배경으로도 삼자는 생각으로 단행한 이 조치에 지역 사회가 크게 감격한 것. 해당 학교에서 준 감사패를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는 동대문을에서 국회 복귀에 성공한다면 서울시립대 부속고등학교를 개설해 교육 수요 충족을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다.
대단한 애처가로 소문나 있는 그는 검사 시절 공무로 바빴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12시 귀가 원칙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