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과거부터 산업스파이 접근을 차단하고 첨단 정보, 핵심 기술력을 독점하려는 경향은 어느 나라에서나 발견된다.
중세 베네치아를 살찌운 가장 큰 힘은 무역이지만, 이 도시 국가에는 비장의 기술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유리 세공 노하우로 이를 보호하기 위해 기술자들을 무라노섬에 유폐해 생산에만 전념하게 했다고 한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서 도공을 많이 납치했는데, 규슈 지역에서는 당시 다이묘가 고급 기술력 유출을 막고 소량 생산만 하도록 깊은 산중에 이들이 가마를 짓도록 했다고도 한다.
좋은 흙을 찾기가 어려운 탓도 있었겠으나 어쨌든 이런 비요(秘窯) 정책이 천황가와 쇼군 일가, 주변의 일부 다이묘들에 대한 선물용으로만 이 고급 도자기를 소량 생산, 유지관리하게 한 비결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산업스파이에 대한 대응, 기술력 유출 방어책은 현대에서는 이렇게 '감추고 숨기고 피하는 식'으로 처리할 수 없다.
특히나 경제력 강화를 위해 각국이 눈에 불을 켠 와중에, 개별 기업은 물론 국가 단위로까지 경제적 비밀, 산업적 기능 획득에 나서는 상황에서는 더 그렇다.
특히나 대기업은 상대적으로 나은 방어 대책을 갖고 있으나, 중소기업에서도 핵심적 역량, 한국 전체를 먹여 살릴 차세대 먹거리 기술을 개발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우리 실정에서는 더하다.
과거에는 기술 유출을 시도하는 산업스파이 케이스가 대기업 특히 IT 분야에 집중돼 있었지만, 이제는 중소·중견기업, 정밀기계 분야까지 확대돼 빈번히 발생한다.
특히나 대기업 방어책에 못 미치는 중소기업의 대응 능력이 문제다. CEO 또는 연구책임자가 기술보호에 관심과 보안인식이 있다손치더라도, 유출 예방 방법과 유출 사고 발생 시 대응력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총체적 난국을 빚는다는 것이다.
업무상 배임, 산업기술보호법, 부정경쟁방지법 등 다양한 방어책을 동시에 갖고 있어 교차적 보호가 가능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아니다. 적절한 수사, 기소와 재판을 통해 산업스파이를 엄벌에 처하기보다는 집행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게 관행화됐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무라노섬에 기술자를 묶어 놓고 숨어서 물건을 만들던 시대처럼 하자는 얘기로 비칠 수도 있다. 즉 피해자가 되기 싫으면 '알아서 숨어서' 하라면서 나라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겠다는 포기 선언을 하는 것이다. 이게 현실적으로 온당한가?
지금 국내에서 일어나는 많은 스파이 행각 사례는 좀 더 나은 대우, 약간의 돈만 보장되어도 유혹에 넘어가 내부자가 협력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이미 작은 칩 하나면 그 안에 종이로 따지면 박스 단위 분량으로 담는 게 가능하며 이를 넘기고 급하게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몇 시간 안에 우리 수사망을 벗어날 수도 있는 시대 아닌가?
미국은 경제스파이법(EEA)를 만들어 엄단 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있는데, 그조차도 너무 느슨하다며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빗발친단다.
기업의 기술력 방어책 마련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경제 난국 속에서 우리가 설 여지는 더욱 좁아지기만 할 것이다.
베네치아식 기술 보호는 이제 답이 아니다. 방패만 가다듬을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창을 들고 산업스파이에 맞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