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전남공무원교육원 강진 유치 확정에 따라 강진 곳곳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에 대해서도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첫 손가락에 꼽히는 곳이 다산초당. 다산이 유배의 설움을 딛고 안정을 되찾아 후진 양성과 저술활동에 몰두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10년 동안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완성한 곳도 여기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통해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이미 복지제도를 제시했다. 올바른 세상을 위해 당시 관료들의 도덕, 행동강령을 매섭게 짚었다.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었다. 백성을 아끼고 위했던 선비가 꿈꾸던 이상적인 공간임과 동시에 조선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연구의 현장이자 공직자를 위한 윤리 교과서의 탄생지였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뿌리의 길'은 또 다른 묘미다. 초당에 오기 전 다산은 오갈 데가 없는 딱한 처지였다. 이를 안 읍내 동문 밖 주막 할머니가 구석진 방 하나를 내줬다. 다산은 이곳을 '사의재'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다지며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다. 사의재는 '네 가지 마땅한 것을 행하는 집'이다. '생각은 담백하게, 외모는 장엄하게, 말은 적게, 움직임은 무겁게 하라'는 것.
다산이 위대한 학자이자 스승이 된 것은 역경 속에서도 네 가지 마땅한 자세를 지켰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 다산학 저술의 첫 출발점이 되게 한 주모의 열린 마음과 공직자로서 네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실천할 수 있다면 다산 공직관의 올바른 자세를 배웠다고 할 만하다.
현재 강진읍내에 자리잡은 사의재는 복원과정을 거쳐 여행자들의 하룻밤 쉼터로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사의재에 머물던 다산을 보은산방으로 이끈 이가 있었으니 이는 승려 혜장이었다. 학식이 높았던 혜장은 다산을 존경하고 자주 찾았다. 주막의 번잡함을 피하고 다산의 제자들이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고성암의 별채를 내놓았다.
벗될 만한 이가 없는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솔바람이었다. 둘은 서로를 찾아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었다. 차를 즐겼다. 백련사에서 둘은 벗이었다.
다산은 혜장의 젊은 제자인 초의에게 유학을 전하며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알고 있던 차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다산에게 제다법을 배운 초의는 탁월하게 차를 만들어 널리 퍼뜨리고 다도를 정립한 후 다성으로 불리게 됐다. 후일 조선 차 문화의 시작과 정립이 백련사 야생차였는데 다산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오솔길은 다산과 혜장, 초의선사의 체취가 서려 있다. 이 길을 오가며 시대와 학문을 씨줄과 날줄 삼아 토론을 벌였다. 소통하는 열린 학습장으로 맑고 향기로운 가르침이 전해온다. 공직자 힐링체험 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길이다.
지금은 걷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길이 잘 조성돼 있다. 곳곳에 긴 의자가 있어 대나무와 차나무 향을 맡으며 제대로 된 쉼을 느낄 수 있다. 높낮이가 심하지 않아 산책길로 그만이다.
어느 해 다산은 월출산 아래 백운동 원림에 들러 하루를 묵었다.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잊을 수 없어 제자 초의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13수의 시를 지어 붙였다. 이것이 바로 '백운첩'이다.
백운동 열두 가지 뛰어난 경관은 옥판봉, 동백나무 오솔길, 홍매, 취미선방, 모란화단, 집 앞의 푸른 절벽, 소나무를 심은 묏등, 정선대, 시냇가의 단풍나무, 술잔을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낼 수 있다는 유상곡수, 폭포, 대나무 밭이다.
다산의 학문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더욱 심오하게 발전하는 데 백운동 원림은 자양분이 됐다.
지금도 개인소유지만 최근 강진군이 나서서 복원하면서 점차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정원으로 들어가기 전 조금만 귀와 마음을 열면 다산의 느낌이 '이랬을 것'이란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줄기사이에 바위를 품은 수백년 수령의 나무, 한문으로 '백운동'이 새겨진 큼지막한 바위, 그늘지고 한갓진 어스름한 분위기, 사색에 젖어들기 딱 좋은 공간이다.
유형의 공간과 함께 시는 어떠한가. 다산의 시 '애절양'은 지나칠 수 없는 가르침이다. 오늘날에도 몸소 새겨야 할 세무공직자의 정신과 자세에 대해 깨우침을 준다. 윤리적 행동강령을 강조하는 지침서다. 조선시대 군역 폐해로 백성들의 생활은 힘들어졌고 결국 세금부담에 자신의 생식기까지 잘랐다. 이를 부둥켜안고 치소를 찾은 부인마저 문지기로부터 내쳐지는 참혹한 광경을 다산이 보고 시로 쓴 것이 애절양이다.
다산이 가장 아낀 제자가 있었다. 황상이다. 그가 은거했던 공간, 일속산방은 청렴 실천의 장이었다. 황상은 부패한 사회를 고발하는 다산 시풍을 계승하며 시에서나 생활에서나 다산의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했다. 일속산방, '좁쌀 한 톨처럼 작은 산속의 집'이란 의미에서 보듯 공직자의 한결같음과 도덕적 청렴성을 배울 수 있다.
찾아가는 길이 자못 슬프다. 강진군 대구면 항동마을에서 정수사 방향으로 가다가 저수지 당전제를 왼쪽으로 끼고 돌면서 논두렁을 지나 오솔길을 걸어야 한다. 집터 표지석이 일속산방임을 알려준다. 다산의 청렴·애민사상, 그 큰 울림이 강진 곳곳에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