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몰락의 나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세계적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산업을 이끄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파악해보는 특별기획 [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대웅제약 1탄 태동과 성장에 대해 살펴본다.
대웅제약의 모체는 부산 수정동 경남여고 앞 '선화약국'이다. 대웅제약의 창업주 윤영환 명예회장은 성균관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학에 대한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선화약국'을 개업했다.
자신만의 공부와 노력으로 다른 약국과는 차별화를 둔 덕에 선화약국의 매출은 연일 뛰어올랐고, 이를 계기로 윤 명예회장은 기업에 도전할 꿈을 품게 된다. 바로 이때 평소 약품 관계로 알고 지내던 대한비타민사의 박문수 사장이 제약회사 인수를 제안했다.
윤 명예회장은 자신의 생각과 맞물린 제의에 망설임 없이 인수를 결정했다. 1966년 총 1억2000만원 중 현금 6000만원에 공장과 기계, 원료 일체를 인수 받고 나머지는 1년 내 지불하는 조건으로 회사를 인수했다.
◆대한비타민 인수, 일류제약사 위한 서울 진출
대한비타민을 인수한 윤 명예회장은 회사에 뿌리내린 고질적인 병폐와 부실기업의 흔적 등을 없애기 위해 편법 없이 정도를 걷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다. 또 원료 입고에서부터 생산과정, 영업사원들의 판매 장애요인과 세일즈 테크닉 등 모두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윤 명예회장의 이 같은 노력으로 1966년 인수 당시 업계 34위였던 대한비타민사는 1967년 24위, 1968년 19위, 1969년 16위, 1970년 상반기에는 12위까지 오르며 매년 60%가 넘는 급성장을 이뤘다.
윤 명예회장의 도전은 계속됐다. 앞으로 더 뻗어가느냐, 이대로 머물러 있느냐를 결정지을 중요한 시기에 윤 명예회장은 회사의 혁신을 위해 'Zero-Defect(무결점)운동'을 업계 최초로 도입했다.
당시 다른 기업들은 생산과 판매에 매달려 있는 상황이었지만 윤 명예회장은 모든 결점만 해결되면 생산과 판매 모두 증가할 것이라 판단했다.
무결점 운동의 일환으로 매일 토론을 진행하고 심지어 사원들을 집으로 직접 불러 숙식까지 함께하며 회사 살리기에 충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인수 당시 350만원에 불과했던 회사의 월 매출은 5년 후 4000만원으로 성장했다.
업계에서 이름을 알리며 성장했지만 한계에 직면했다. 부산이라는 입지적 여건의 한계였다. 당시 부산은 서울에 비해 유능한 인재와 양질의 원자재 확보, 경영정보 및 의약기술정보 수집 등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윤 명예회장은 과감하게 서울 진출을 감행했다.
1972년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에 4300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1400평 규모의 공장건물 공사에 착수, 1972년 9월 성남 공장이 완공됐다. 이어 1973년에는 제약업계에서 네 번째로 기업공개를 단행하고, 우리사주조합도 발족시켰다. 이는 주식을 몇 사람의 대주주가 소유하기보다 사원이 소유하는 것이 좋으리란 판단에서 실행에 옮겼다.
성남 진출 3년 후인 1975년에는 서울 중구 동자동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사옥도 마련했다. 1981년 서초동 사옥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회사의 모든 주요 업무가 이곳에서 싹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웅제약으로 첫발, 우루사와 함께 열다
윤 명예회장은 1974년 새로운 제품 개발과 기존 제품의 개선을 위해 부설 제약연구소를 설립했다. 부설 제약연구소에서 독자적인 원료합성개발을 위한 연구가 시작됐고, 대중약 중심의 제품 구조를 병원 약품 중심으로 변경해 나갔다.
바로 이때 대웅제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웅담성분 간장약 '우루사'가 탄생했다. 당시 간장약 시장은 이미 다른 업체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상황이었다.
윤 명예회장은 타사의 제품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제품이 필요함을 인지했고, 그 순간 최고의 약효를 낸다는 웅담을 생각해냈다. 간장질환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웅담을 어떻게 약효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던 끝에 탄생한 약이 바로 '우루사'다.
우루사는 1961년 정제로 발매된 이후 1974년 세계 최초로 연질 캅셀화, 1977년 연질 캅셀 자동 생산화 등으로 품질과 효능이 향상됐다. 1974년 1억원의 판매실적을 기록한 이 제품은 1985년에는 무려 127억의 매출을 올렸고, 1990년에는 200억원에 이르렀다.
10년간 100배 성장. 도저히 믿기지 않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는 중심에 우루사가 있었던 것이다. 대웅제약은 우루사로 1980년대 중반 제약업계 10위권 진입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고, 이는 실로 대단한 결과였다.
대웅제약이라는 사명은 1978년 탄생했다. 대한비타민사 창립 33주년을 맞아 대한비타민의 '대'자와 우루사에서 영감을 받은 '웅'자를 합쳐 대웅제약이라는 이름의 제약회사로 재탄생한 것.
대웅제약은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한 노력에도 최선을 다했다. 1982년 다국적 기업인 미국의 일라이 릴리사와 합작계약을 체결해 ㈜대웅릴리를 설립했고, 1983년에는 세계 제일의 연질캅셀 회사인 미국알피쉐러사와 50대50 합작비율로 한국알피쉐러를 설립했다.
2년 뒤인 1985년에는 세계 최대 종합 화학 메이커인 미국 듀폰사를 파트너로 의료기기사업에도 진출했다. 이는 제약 일변도에서 진일보해 토탈 헬스케어 그룹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1988년 2월에는 국내 최초로 국산 배합신약 종합 소화제 베아제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개발은 19667년부터 시작했지만 원료 단독 공급을 계약했던 일본 제약사와의 트러블, 갑작스러운 약사법 개정 등으로 베아제 개발은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토탈 헬스케어 그룹으로 발전…다음무대는 세계로
자체적으로 제대로 된 소화제를 만들었다는 자신감을 얻은 대웅제약은 1988년 삼성동으로 본사 사옥을 이전하고, 1989년 대웅경영개발원 개원 등 사업 규모를 점차 확대시켰다.
하지만 1990년 이후 글로벌화를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 필요했다. 선진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신약물질의 개발과 기업운영 전반의 정보화가 그것이다.
대웅제약은 먼저 신약개발에 몰두했다. 그 노력의 최초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국내 바이오 신약 1호인 '이지에프'다. 당뇨병성 족부궤양 치료제인 이지에프는 높은 완치율과 다양한 적응증 덕분에 대웅제약의 효자 제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도 도입했다. 지금은 보편화된 프로그램이지만 1997년 당시 제약업계 최초로 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ERP)을 들여왔다. 외부에서 납품 입찰이 어떻게 진행되며, 신제품 개발이 어떤 단계에 진입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하는, 말 그대로 경영 효율화 시스템이다.
대웅제약은 또 우수한 연구인력과 앞서가는 개발 능력 및 창의력이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전 사원에게 노트북을 지급하고 모바일 오피스를 구현해 외국계 제약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능력이 뛰어난 여성인력을 위한 복지를 강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대웅제약에서는 출산 전후 탄력적으로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고, 재택근무도 가능하다. 훌륭한 인력이 지속적으로 근무하면 그만큼 회사의 경쟁력이 올라가는 것이라는 게 윤 명예회장의 생각이다.
2002년 10월, 윤 명예회장은 대웅제약을 지주회사인 대웅과 대웅제약으로 분할 상장함으로써 회사를 제약기업의 범주에 머물기보다는 글로벌 헬스케어 그룹으로의 도약을 위해 미래지향적인 경영체제로 본격 개편했다.
2012년에는 지식경제부로부터 글로벌 기업 육성 프로젝트인 월드클래스300선정기업에 지정돼 신약개발과 해외 진출 등에서 원활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상호 협력의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2013년에는 중국의 제약회사 바이펑을 인수해 2017년 말까지 중국 심양에 제약공장을 완공하고 2018년부터 세파계 항생제와 내용액제 완제품 등을 직접 생산 및 판매를 계획하고 있다.
대웅제약은 앞으로도 국가별 생산거점 확보를 통해 중국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등 각 진출국가에서 No.10 안에 드는 것을 목표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