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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카드·산업은행·우체국도 무시하는 '한국 여권'

성명변경 불가 판결 나와…개인행복추구권 침해에 본말전도 우려까지

임혜현 기자 기자  2015.11.04 09:2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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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여권의 영문 이름이 한글 발음과 명백하게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영문 철자를 바꿀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와 논란이 예상된다. 더욱이 문제의 판결 기반에는 국가 사무의 대외적 공신력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돼, 성명 표시 등을 침해받지 않음으로써 보장될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사법부가 경시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는 ㄱ씨가 "여권 영문명 변경을 거부한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ㄱ씨는 2000년 자신의 이름에서 '정'을 영문으로 'JUNG'으로 표기한 여권을 발급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여권 재발급 신청을 하면서 이를 'JEONG'으로 변경해 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거절당해 소송을 냈다.

통상적으로 병역 문제가 있는 경우(단수여권 대상)를 빼고는 여권은 10년 유효로 발급된다.

ㄱ씨는 소송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 고시인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근거로 들었다. "(이에 따르면) 'ㅓ'는 'eo'로 표기하도록 규정돼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어린 시절부터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정'을 'JEONG'으로 표기했기 때문에 바꾸지 않으면 해외에서 활동할 때마다 여권의 인물과 동일인임을 계속 입증해야 할 처지"라고 호소했다.

'우리 여권 공신력 문제' 다수 위해 개인 희생? 과거 고법 태도에서 후퇴

그러나 이는 인정되지 않았다. 여권법 시행령의 영문 성명 정정·변경 사유는 '여권의 영문 성명이 한글 성명의 발음과 명백하게 일치하지 않는 경우'나 '여권의 영문 성명의 철자가 명백하게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경우' 등이다. 그런데 재판부는 "우리나라 여권에 수록된 한글 이름 '정'은 JUNG, JEONG, JOUNG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돼 있고, 특히 JUNG으로 표기된 비율이 약 62.22%에 이르는 반면 JEONG은 28.25%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표기법 규정보다 일명 대세에 따라 그냥 쓰라는 입장인 셈이다. 무엇보다 재판부는 "영문명 변경을 폭넓게 허용하면 외국에서 우리나라 여권의 신뢰도가 저하될 수 있다"고 설시했다.

이는 만에 하나 우리 국민이 여권 전체의 공신력 의구심 증대로 인해 받을 수 있는 피해 방지, 즉 불특정 다수의 추상적 이익 보호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포기시킬 수 있다는 사상으로까지 읽을 수 있어 극히 우려되는 대목이다.

더욱이 이미 성명을 표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2010년 9월에 서울행정법원에서 "유효기간 만료 여권의 경우, 영문명 YOUN→YEON 변경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바 있다. 성명을 바꿔 개인이 얻을 만족감과 행정적 불편이나 국가의 불이익이 중요하다는 견지에서 본다면 이전의 판결이 더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듬해인 2011년 봄에 서울고등법원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

설사, 유효기간이 아직 남은 여권이라 해도 전산망으로 업무를 관리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수정 처리와 출입국 기록 신설, 통합 등을 사실상 물리적으로 하기 어렵다고 할 이유가 없어 외교 당국이나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에서 곤란을 겪을 가능성은 작다.

만약에 아직 기간상 유효한 여권을 폐기하고 새 여권을 만들겠다고 주장한다면, 이전에 개인이 외국 정부로부터 받아놓은 비자 등의 처리가 문제가 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전자여행허가제(ESTA) 등은 상당한 기간을 두고 사용하기 때문에 여권명을 변경하는 등으로 혼선을 겪을 수 있다. 

다만 이를 변경하거나 갱신하는 절차적 불편은 개인이 감수할 문제이자 개인 대 외국 정부의 문제라 우리 당국이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는 등 나설 사안이 아니다. 해외 정부 당국에 협조 요청을 굳이 해 준다면 모르겠으나, 이런 행정적 불편 역시도 넓게 보면 우리 당국의 일이므로 하등 문제는 없다.

신한카드·산업은행 등 국책-민간 모두 무시하는데 무슨 해외 공신력? 

해외에서의 우리 여권 공신력이라는 추상적 법익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도 주요 문제로 거론할 만 하다.

이 같은 외교부 당국의 성명 변경에 대한 소극적 자세에 대해 이미 본지에서는 지난 초가을부터 여러 문제를 별도로 문의 조사한 바 있다.

현장 창구나 전화 접수 시도 등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국내 각 금융기관은 업종(은행이나 카드), 국책-민간 등 영업양태를 안 가리고 여권의 공신력 자체를 못 믿겠다며 꺼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여권은 해외 대다수 국가에서 무비자 통과와 일정 기간 체류가 가능해, 위조나 변조의 대상이 돼 왔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전자여권제로 발행 기법이 진화한 바 있고, 이에 따라 이미 대부분의 사용자가 전자여권으로 변경 발급을 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 같은 우수한 위조 방지 기법의 산물인 전자여권은 국내에서조차 신분확인용으로 외면받고 있다. 행정고시 시험장이나 토익 고사장을 빼고는 사실상 금융거래 등엔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는 것. 신용카드 분실시 분실 및 정지 후 재발급을 바로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본인 확인용으로 주민등록증은 발급청과 발급일자를 부르면 되나, 여권은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주민등록증의 경우도 전자기능으로 이미 오래 전 교체된 것이긴 하나, 특별히 번호 관리제라는 점에서 여권 대비 우수할 것이 없다. 여권에도 발급일자와 생년월일이 표기되고 별개의 항목으로 주민번호 뒷자리의 고유번호가 표기되므로 이를 조합하면 번호 전체가 도출되며, 여권의 개별적 코드 번호도 있으므로(전자여권은 M******의 형식), 문제를 삼을 이유가 없다.

특히 창구에서 접수를 하려고 해도 불이익이 있다. 우체국의 경우 서울 모 지점에서 우체국 체크카드 분실신청된 내용을 해제하려고 하며 신분증으로 제시하자 다른 신분증은 없냐고 되묻는 사례가 파악됐다. "신분증 스캔을 떠야 하는데 좀 곤란하다"는 것. 우체국까지는 그래도 사용은 가능한 경우다.

산업은행 인천 모 지점은 통장 개설시에 신분증으로 여권을 제시하자 난색을 표했다. "그러면 신용카드를 달라"는 요구에 따라 기업은행BC카드 고유번호와 사용자 인적 사항 등을 사용해 개인 확인을 해 절차를 진행했다. 사실 이 경우 신용카드 개인 영문명이 여권명과 다른 경우 또 거절이나 추가의 번거로움을 겪을 여지도 있는 가능성도 있으나 이는 차제에 논의하기로 한다.

결국 여권의 해외 공신력이란 극히 추상적인 것은 동시에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국가주의적 개념이지, 일반적으로 국내에서조차 우리 신분증으로서의 값어치를 크게 인정치 않는 터에 사법부가 이를 논증하고 보호하겠다고 하는 것은 문제다.

우리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정서의 과잉 표출이 아니라 오히려 해외 당국에 대한 저자세로 볼 여지도 있는 만큼, 사법부의 의식 개선이 필요할 뿐더러 이 같은 의견에 동조하거나 쉽게 편승하려는 우리 당국의 기조가 있다면 우선 국내 금융권의 신분증으로서의 불신 문제부터 처결한 뒤 개인들의 변경 민원에 대처하는 게 순리일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