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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철의 여정] '만족과 불만족'

정보철 이니야 대표 기자  2015.10.30 13: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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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왕이 고통스러운 병을 앓았다. 왕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법은 만족한 사람의 셔츠를 얻어 입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은 그 셔츠를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왕의 전령들은 온 나라를 샅샅이 뒤졌다.

수 개월이 지나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을 딱 한명 찾아냈다. 그러나 전령들은 셔츠를 가져올 수 없었다.

"폐하, 그는 셔츠가 없습니다."
 
이는 단지 우화일 뿐이고 진실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누구나 인정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는가. 우화는 허구상의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진실이 녹아들어 있다. 논리만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화에서 독특한 삶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진실이 체현된 것이 우화에서 상징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우화는 의미심장하다.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은 온 나라에 딱 한명 뿐이다. 모든 것을 갖고 있다는 왕마저도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한명은 어떤 사람인가. 이 우화에 나오는 단서로는 셔츠마저 사 입을 수 없는 가난뱅이다. 남들이 보기에 멸시당하기 십상인 가난뱅이가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 유일한 자인 것이다.

만족은 영원한 바람이다. 연령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만족을 간절히 원하는 것 같다. 바라는 것을 얻었을 때 이뤄지는 충족감을 맛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을 해보자. 

당신은 무엇을 바라는가. 바라는 그 무엇이 영속되기를 원하는가. 또한 바라는 것을 충족하는 만족감이라는 것은 과연 영원히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답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찾는 것에 앞서 찾는 자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찾는 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찾는 대상만 거론한다는 것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다.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을 별개로 보면 안 된다. 찾는 자와 찾는 대상을 하나로 봐야하는 이해가 필요하다.

에릭 프롬에 의하면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생존양식이 있다. 소유의 삶과 존재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소유양식에서 나와 세계와의 관계는 소유와 점유의 관계다. 소유양식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 자신들이 소비하는 것과 모든 것을 함께 한다. 이들은 소유물을 소비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한다.

소유양식의 사람들은 어법에서 뚜렷한 특색이 있다. 이들의 어법을 보면 '아내가 있다'가 아니라, '나는 아내를 가지고 있다'가 된다. 소유양식에서는 모든 것이 소유물이다. 신념, 권위, 사랑, 지식, 선행, 사상뿐만 아니라 습관마저도 소유대상이다.

존재양식은 자신과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생존양식이다. 존재양식의 삶은 살아있다는 것에 충만감을 느끼며 타인과 사물, 자연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인간은 소유양식, 존재 양식 어느 한쪽만을 갖고 있지는 않다.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이 묘하게 동거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 양식이다. 소유양식이 우위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존재양식의 몰락은 아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한쪽에 치우친 삶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소유나 존재냐'를 통해 우리는 자기인식에 대한 힌트를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에 대한 이해, 앞서 얘기한 찾는 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된다면, 우리는 바라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소유와 존재가 바로 만족과 불만족을 가르는 절대 기준이기 때문이다.

바라는 것을 얻었을 때 이뤄지는 충족감이 만족이라 했다. 이는 다른 것을 바라지도 않고 바랄 필요도 없는 상태이다. 만족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일시적인 만족(또는 즉각적 만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속적인 만족이다. 일시적인 만족은 당장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소유의 삶에서는 일시적인 만족만 있을 뿐이다. 일시적이란 말은 한시적이란 말이다. 만족한 느낌이 오래가지 않는 것이다. 소유의 삶은 소비하는 데 만족을 느낀다. 자기가 가진 것을 빼앗기기 않았다는 것에서 만족하는 것이다. 허나 곧 다시 소비를 원하게 된다. 이전의 소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족감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만족감이 사라지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것에 대한 불안이 엄습해온다.

영속적인 만족은 허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유와 소비를 떠나서 존재하는 인간은 없다는 것을 전제하에 하는 말이다. 인간은 육체, 음식. 주거, 옷, 일용품을 생산하데 필요한 도구들을 소유하고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릭 프롬은 이에 대해 이런 형태의 소유는 인간존재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생존적 소유'라는 개념을 적용했다.

사실 만족은 자아가 개입된 개념이다. 자아가 개입될수록 만족은 없다. 자신의 욕구에 치중하는 것은 소유의 다른 측면이다. 나를 중심으로 다른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것은 필히 대립과 불안감을 잉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앞서 얘기한 소유성향의 삶은 자아가 강화된 삶이다.

반면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사라졌을 때 만족은 증폭되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이것을 '자기초월'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인간의 욕구 5단계설'을 발표한 후 이보다 더 우위에 있는 단계로 '자기초월'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존재양식의 삶과 궤를 같이한다.

'도전과 응전'으로 회자되는 역사에서 주목할 것은 만족이다. 생사의 대결구도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의외로 만족스런 삶에 대한 스토리가 풍부하다.
서두에 우화로 시작했기 때문에 우화로 끝을 맺는다. 또 다른 가난뱅이 이야기이다.

공원 모퉁이의 벤치에 가난뱅이가 누워있었다. 그는 혼자 공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게 구두쇠 부자이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허망하다. 나는 큰 부자가 된다면 매일 화려한 파티를 열 것이다.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마음껏 자선을 베풀 것이다."

그때 어떤 사람이 가난뱅이에게 다가왔다. 마법사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당신이 부자를 꿈꾼다는 것을 안다오. 자 지갑을 주겠소. 지갑 안에는 금화가 하나 있소. 그 금화를 꺼내면 금세 새 금화가 생긴다오. 얼마든지 꺼내도 좋으나 단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소.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되었을 때 이 지갑을 강물에 버리시오."

가난뱅이는 놀란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가난뱅이는 시험을 해봤다. 마법사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는 밤을 꼬박 새워서 방안 가득 금화를 채웠다.

"하루만 더 금화를 꺼내자. 그러면 두 배의 백만장자가 되겠지."

하루가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하루만 더, 하루만 더를 생각했다. 그동안 그는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눈을 뜨기 무섭게 금화를 꺼내는 일에 몰두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지 이미 오래전.

그는 허약한 백발노인이 돼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에서 금화를 꺼내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러시아 작가 이반 안드레예비치 크릴로프가 쓴 '크릴로프의 우화'에 나오는 얘기다. 

정보철 이니야 대표, '고전경영'·'한 끗 차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