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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51] '자서전 쓰기 돕는 SW 추진'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

"당신의 이야기가 곧 역사"…튼튼한 기록문화 일궈 한류콘텐츠 뒷받침 꿈

임혜현 기자 기자  2015.10.30 14: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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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지금 일명 '자서전 대필 시장'이 사실 싼 게 아니에요. 500만원은 듭니다. 인쇄비 등은 빼고 원고를 적고 정리해 주는 대필료만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도 고심하고 있습니다."

지방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수집해 기록하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는 관리를 패관이라 했다. 이들이 남긴 기록은 소설의 모태로 불리는 패관문학이라고 한다. 패관은 비록 말단 관원이었지만, 그들의 정성스러운 붓끝을 거쳐 살아남은 패관문학은 당시 민초들의 삶과 정서, 사회 분위기 등을 연구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다.

우리를 흔히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나라라고 한다.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사소한 말과 기록만으로도 멸문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 나머지 일부 문집류를 엮는 것 외에 사실을 기록하는 문화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당신의 이야기가 곧 역사'라고 외치며 현대판 패관이자 사관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어 눈길을 끈다. 문화 기반이 되는 기록을 아끼는 나라, 기록이 강한 나라의 기반을 이제부터라도 닦겠다는 포부 아래 지난해 1월 설립 인증을 받은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이 그들이다.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은 인생2모작을 꿈꾸는 시니어들의 활로를 개척한다는 사명감도 지니고 있다. 역사가 아직 길지 않은 조직이 막중한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 짊어진 셈이다.

"자서전을 직접 쓰는 과정을 쉽게 진행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개념상의 프로그램이 아니고 진짜 기계 프로그램, SW 말입니다. 우리 조합원 중에 은퇴한 프로그래머가 있거든요. 내년 출시를 목표로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 조합은 2013년 하반기 서울 인생2모작지원센터에서 교육과정을 함께 밟은 이들이 주축이 돼 탄생했다. 소소하지만 함께 곱씹어볼 만한 흔적을 남기는 채록의 매력에 빠진 이들이 이를 본격적으로 새로운 직업의 장으로 승화시켜 보자고 뜻을 모은 것. 이런 태동 배경 때문에 40대 참가자들도 있지만 조합 구성원들 중 50~60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특히 이들은 사회학이나 민속학 연구에서 많이 쓰이는 '라포(Rapport)'에 집중한다. 라포는 연구자가 한 걸음 떨어진 태도로 냉정하게 관찰을 하는 게 아니라 연구 대상자와 공감이 가능한, 친밀한 관계를 말한다.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은 연구 과정에서의 라포처럼 오랜 세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들어주기'를 통한 힐링 파트너로서의 신뢰감을 구축하기 위해 압축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광희 이사장은 이야기채록사협동조합과 채록사들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구술자들은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인 경우가 많다"며 "50대 같은 시니어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대 차이도 상대적으로 적고 '라포'를 형성하기도 쉽다"면서 "이 같은 작업이 지루하기보다 사회적 가치가 있고 비전도 있음을 매번 느낀다"고 말했다.

채록 전부터 친해지기 작업이 시작된다. 전화로 먼저 대화를 나누고 인터뷰는 1주일 뒤 이뤄진다.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정리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인터뷰를 통해 만들어진 구술 자료는 반복해서 풀어낸다. 녹취 내용으로 밑자료를 만드는 기록화 과정이다. 이런 전사 작업 10배의 공을 들여야 한다. 1시간 이야기일 경우 기록화 과정에 10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해 엄청난 매출을 올린 단계는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채록협동조합은 출범 원년인 지난해 서울시 '마을공동체 채록가 연수과정'을 따내 진행했다. 이후 '대기업의 서울시내 전통시장과의 상생 실태 조사(서울연구원 공모 연구과제 선정)'도 맡는 등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올해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는 해외 체류 한국교민의 민주화 활동과 경험 사례 기록 사업 중 일부를 맡았다. 까다로운 전사 단계 작업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이 협동조합이 그동안 진행해온 일련의 작업이 관련 학계나 유관기관들 사이에 정평이 났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사업을 맡을 경우 적게는 3000만원, 많게는 5000만원 선에서 위탁된다. 억대 매출 진입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22명의 조합원 모두 IT전문가, 기자, 국어교사 등의 이력을 지녔다는 데서 머지않아 역량을 발휘할 것이라는 주변의 시각도 없지 않다.

또한 협동조합 채록사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상임고문단 역시 두뇌 집단이다. 김익한 교수의 경우 명지대 기록정보과학대학원장 이력에 빛나는 각종 기록 관리의 선구자이며, 최래옥 교수는 한양대 명예교수로 후학들에게 연구일선을 물려주기 전까지 구비문학을 수집하러 오랜 세월 몸소 지방을 누빈 인물이다. 

이 이사장은 "우선 채록사가 무엇인지 설명부터 해야 하는 등 힘든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사명감을 갖고 진행하고 있다"며 "우리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쌓여온 것, 묵은 체증 같은 게 내려간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책을 각자 쓰지 못하는 게 현실이고, 우리 조직은 스스로 책을 쓰는 작업을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단 각종 채록 관련 사업과 대필 사업 등 투트랙으로 조합 활동 방향을 정하고 더욱 활성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산하 기록원 설립 소식 등은 협동조합으로선 반가운 소식이기도 하다. 각 지방자치단체 단위에 이런 조직이 마련될 것이며, 관 위주의 선도적 활동이 시작되면 민간 채록사들의 영역도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사장은 마지막으로 한류에 활력을 불어넣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기초자료가 탄탄해야죠. 한 권의 책이 연극과 영화와 뮤지컬 등으로 재생산되는 '원소스 멀티유즈'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사소한 기록을 모으는 작업도 넓게 보면 한류의 원자료를 생산하는 일인 거죠. 이런 점에서 사명감을 갖고 할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한류에 활력소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