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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컷] 힘겹게 다리 건너도 '겨우 내가 되는' 시대

임혜현 기자 기자  2015.10.18 19: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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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김애란의 단편 소설 '서른'에는 갓 20대 문턱을 넘은 재수생과, 지방에서 사범대를 졸업한 임용고시 준비생이 노량진에서 만났던 인연을 한참 후에 다시 편지로 확인하는 내용입니다.

그 재수생도 어느덧 대학을 졸업해 그때 그 언니 이상의 나이를 먹었지요. 고학으로 어렵사리 학사모는 썼지만 인기없는 제2외국어 전공이라 취업이 안 돼 고생하다 결국 옛 남친에게 '낚여' 다단계 조직에 들어가지요. 빠져 나오고 싶었으나 결국 자신이 대학생 시절 잠깐 아르바이트로 보습학원에서 일할 때의 제자를 '넘기고서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주인공은 어리고 젊은 학생들을 바라보며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고 씁쓸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배경으로 처음 임용고시생 언니를 만났던 노량진을 떠올리며 '합격해야만 떠날 수 있는 섬, 노량도'였다고 이야기하죠.

서울 동작경찰서 쪽과 국철 노량진역을 연결하는 노량진 육교. 지난 1980년 만들어진 이 노량진 육교가 드디어 18일 새벽 철거됐습니다.

이 다리는 아주 이른 아침부터 가방을 젊어진 많은 젊은이들이 오가는 곳이었는데요. 바로 대입 재수를 하는 학생들이 주변 명문 학원으로 갈 때 이용하는 통학로였고, 그보다 불과 몇살 위인 공무원이나 임용고시, 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이들도 많이 오가던 장소입니다. 시간당 보행인구가 2800명선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수많은 청춘들의 추억과 애환이 담겨 있는 곳이니만큼 이제 낡아 안전상 이유로 허문다는 소식에 아쉽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이른바 '합격다리'라는 희망사항 섞인 명칭으로도 불렸다고 하는데, 실제로 공무원으로 일하는 이들 중에 이런 아쉽다는 반응을 보이며 온라인상에 리플 등을 남기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마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이들 중에도 그 시절을 떠올리는 향수의 매개체로 이 다리를 떠올리며 같은 마음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다리는 단순히 현실 세상에서 장소와 장소를 연결해 주는 구조물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는 만큼 드라마틱한 소재로 많이 활용되기도 합니다. 중국 고사 '미생지신'엔 다리 밑이 장소로 나옵니다. 불어나는 물에도 불구하고 다리 기둥을 껴안고 데이트 약속을 지키려다 죽은 안타까운 러브스토리(융통성 없는 서생 이야기)죠. 장비의 무용을 드러내기 위한 소재로 '장판교'가 나오는데, 혼자 다리를 틀어막고 버티자 적군이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하지요.

현생과 꿈(이상)을 잇는 상징으로도 다리는 거론됩니다. 북유럽 전설에서는 오딘의 나라와 현세를 잇는 '무지개 다리' 이야기가 나오고, 용맹히 싸우다 죽는 바이킹은 천사의 인도로 이 다리를 건넌다고 합니다.

일본 전설에도 다리가 현세와 이계를 잇는 소재로 나오거나 감모여재(感慕如在: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짐)의 내용인 경우가 많답니다. 병풍 등에 여자를 수놓은 것은 사랑하는 이가 건너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나타내며, 그런 여자의 그림은 다리의 수호신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종합해 보면, 시대와 민족이 달라도 다리에 거는 기대와 열망은 모두 대동소이 같았다고 요약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최근 살기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더 팍팍해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서른'은 그 육교를 건너 다시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었으나 결국 좌절한 이들이 점차 늘고 있으며, 그런 이들이 패자부활전은 커녕, 아무 안전망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시대가 됐다는 경종으로 읽힙니다. 아무리 노력해야 '겨우 (인간관계고 뭐고 다 파탄난 비참한)' 주인공처럼 되는 사람이 많고 앞으로 더 많아질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일 수가 없습니다.

80년대와 90년대, 노량진 육교가 가장 많은 사람을 건네주며 한 시절을 풍미하던 때는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돌이킬 수 없는 경제 불균형 시대로 들어서기 전과 우연하지만 겹칩니다. 노력하면 재수를 하든 자격증 시험 공부를 하든 최소한의 기회는 있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기본적으로 3당4락이니 하는 비인간적인 정신력으로 공부를 하는 때는 아니나, 돈이 없으면 아예 재수를 못 하지요. 그래서 이 육교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어떤 '기회의 다리'가 있던 시대를 보내는 마지막 조종 소리'처럼 느낀다는 것은 결코 좋은 징후는 아닐 것입니다.   

마침 정부에서 결혼도 못하는 청춘들을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만든다는 소식도 다리 철거 뉴스와 함께 들려 옵니다. 아무리 좋은 다리인들 때가 되면 없어지고 또 그래야 하기도 하겠지만, 대신 어딘가에 또다른 새로운 다리가 생기길 또 그런 믿음만큼은 유지되는 시대가 되길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