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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찬찬히읽기]내 고향으로 - 이기형(1917~)

프라임경제 기자  2007.05.19 16:3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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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내 고향으로 -이기형(1917~)

나는 아침마다
고향 뒷산에 오른다
언덕을 넘고
숲길을 헤쳐
나무뿌리에 걷어채이고 엉덩방아도 찧으며
헐떡헐떡 올라간다
깜빡 정신이 들어……
여기는 분명
서울 서대문 밖 안산
자못 실망하지
안산 뻐덩바위가
고향 뽀로지 뿔바위와 섞바꿔 숨바꼭질한다

종로행 버스를 타도
어린 고향길이……
검정 광목 책보를 끼고
아랫마을 냇가 돌바닥길을 타박타박 내려간다
들물은 솨랑 소랑 시원스레 흘러가고
옆산 뒷산에서는 소쩍소쩍 자꾸만 울어옌다
가리매고개엔 아침 해가
소고삐만큼이나 돋아 있다
저어기 아래켠에는
등짝에 책보를 질끈 동여맨 쪼무라기들이
올망졸망 앞서거니 뒷서거니
싯큰, 돌부리에 걸려 상체가 기우뚱
머리를 살레어
세종로 바닥으로 돌아온다
빨간 신호에 급정거하는 버스

구파발에서 백운대를 향해
터벅터벅 올라가면
고향 건넌산이 솟아온다
너른골이 열려 온다
지경장고개 서낭당 앵두나무가
알록달록 어른거린다
하얀 사기그릇을 차곡차곡 포개 담은 광주리를 목이 휘어져라 이고
어머님은 고갯길을 바등바등 넘어가신다
가랑 사랑
졸졸 찰찰
퍼뜩 정신이 들어
북한산 골짜기에서
흰 거품을 뿜으며 흘러내리는 물소리
시냇가 얕으막한 물 속에 어른거리는 저 물모래……
그랬지, 어머님은 그때
다 퍼담은 물동이에 쪽박을 엎어놓고 허리를 구부려
가생이 해맑은 물모래를
조심조심 집게손가락에 받쳐 올려
쓱쓱 이를 닦으셨지

아, 어찌
다시 못 보고 눈을 감아
정겨운 고향길
어릴 적 친구들
날아가야지 삼팔선 상공을 넘어
저기 고향 산천이
신기루처럼 둥둥 떠오는구나

<‘별꿈’ 중에서, 살림터, 1996>



2007년 5월 17일 오전 11시28분, 56년 만에 철마가 달렸다. 시인의 고향이 있는 북쪽으로 철마가 달렸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어가 현실로 실현됨으로써, “달리고 싶다”는 기원형이 “철마는 달렸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맑은 날 하늘을 보면, 이런 날 누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겠는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의 한을 가슴에 품은 실향민들 이산가족들의 가슴 속에 한 번도 피눈물이 흐르지 않은 날이 없는 분단 반세기였다.

분단이 일세기를 향하고 있다. 분단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이제 자꾸 돌아가시고 있다. 북쪽에 고향이 있는 남쪽 실향민들, 남쪽에 고향이 있는 북쪽 실향민들이 이제 최소한 환갑을 훨씬 넘기고 있다.

이기형 시인의 시 속에는 고향에 대한 간절함이 구절구절 배어 있다. 종로를 오가면서도 이릴 적 고향 마을의 등짝에 책보를 질끈 동여맨 쪼무라기들이 보이고, 서울 서대문 밖 안산과 고향 뽀로지 뿔바위가 섞바꿔 숨바꼭질한다. 그 간절함에 가슴이 저리다.

이기형 시인, 1917년 11월 11일생, 올해 나이 90, 시인 살아계시는 동안에 통일이 오기를 바란다. “통일이 오기를 바란다”는 말이 “통일이 왔다”로 바뀌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전무용/시인

1956년 충북 영동 출생
한남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3년 <삶의 문학> 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희망과 다른 하루>(푸른숲)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시 전문 계간지 <시와 문화> 필진
현재 대한성서공회 번역실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