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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온정론, 대법원 '경영판단이론'에 먹칠

[비겁한 소극사법주의①] 적극적 판단 요구에도 '환송카드'로 고법에 책임 전가

임혜현 기자 기자  2015.09.18 22: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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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법원이 '소극사법주의'에 경도된 모습이다. 판결 시 법문언을 해석하는 데에만 그치치 않고 정치적 목표나 사회정의 실현 등을 염두에 둔 적극적 법형성 또는 법창조를 강조하는 태도를 '적극사법주의'라고 하고 그 반대의 자세를 소극사법주의라 한다. 

적극사법주의라 해서 반드시 진보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도 성립한다. 진보 정권이 해당 색채의 정책을 계속 수립하고 입법부에서 이런 법률을 만들어 지원하는 것에 대해 사법부가 관련 사건을 심리하는 기회에 나서서 해석론과 헌법합치적 해석 등을 통해 제동을 거는 경우는 보수적인 적극사법주의다. 대공황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에 미국 사법부가 제동을 걸었던 게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적극사법주의는 특정 이념의 전유물이 아니라, 법원의 역할 모델과 현실에 대한 기여 방법론에 대해 어느 정도 적극성을 인정하고 추구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어 나쁘게 볼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런 소극사법주의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것일까.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경제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에 대해 법원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경향을 사법부 독립이라는 대의명분 때문에 그대로 존중하기엔 한국 사회가 직면한 경제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려의 근저에는 법문언에만 그치는 선에서 법원이 해석하고 판결한다면 사회적 비용이 추가로 발생한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죄질 안 좋은데 파기환송?…일반인엔 '봐주기'  

2013년 7월 회삿돈 수천억원을 횡령 및 배임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최근 대법원의 파기환송 통지표를 받았다. 이에 따라 '기사회생' 기회를 맞았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하급 법원들은 그에게 중벌이 불가피하다는 기본적 판단을(일부에서는 1심과 항소심 모두 검찰의 전체 혐의 금액 주장 중 상당 부분을 줄여 판결해 줬다며 이들 역시 온정주의라고 비판하지만) 했지만, 대법원은 이 차원을 넘어선 소극적 계산법의 극치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범죄 혐의들 중 이 회장이 자신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팬 재팬'을 위해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CJ그룹 일본법인을 연대보증인으로 내세운 점에 대해 대출금 채무 전액을 팬 재팬의 이득액으로 판단, 특정범죄경제가중처벌법을 적용한 것은 문제라는 게 이번 대법원 판단의 기본 골격이다. 따라서 이 액수를 따져 봐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특경가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으니 이를 다시 검토하라며 '파기환송'한 것이다.

문제는 일반인들은 파기환송은 잘못 처리한 것이니 줄여 줘라 혹은 무죄로 풀어 줘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재벌에 대해 법원이 다시 관대해진 게 아니냐는 오해를 사면서까지 이런 카드를 내밀 필요가 있었을까. 대법원은 서울고등법원의 판단에 대해 비판하고 자신의 판결로 끝내는 이른바 '파기자판'도 가능한 터다.

대법원은 왜 이 같은 처리 방법을 택해 서울고법이 맡게 될 파기환송심에서 이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날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일까.  

◆공 넘기기로 경영판단이로 확정 숙제 미뤄

여기서 대법원 판결의 행간을 다시 읽어 보면 대법원은 특경가법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지, 자기 개인회사에 대해 그룹 계열사(외국에 설립된 현지법인)를 연대보증인 등으로 활용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배임의 성립에 대한 불만을 서울고법에 표한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액수를 어디까지 잡는가에 따라 특경가법 적용이냐 일반법 적용이냐가 달라지는 기술적 쟁점에 대한 지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에도 파기자판을 하지 않고 굳이 내려보냈는가의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관대한 결론을 확정한다 해도 대법원 판결에 의한 것이든 파기환송심에 의한 것이든 어차피 법원 전반이 재벌에 대한 온정론에 다시 빠져들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경영판단이론에 대해 대법원이 목소리를 내는 데 부담을 느낀 터에 지나치게 세부적인 꼬투리를 잡아 서울고법으로 공을 넘겼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영판단이론(경영판단의 원칙)이란, 기업 고위층이 다소 위험 부담이 있는 경영상 판단을 했고(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배임의 기본 틀을 충족)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손해를 입게 됐다고 하더라도  죄를 묻지 않겠다는 사고관이다. 경제의 성장과 기업의 역할론에 이미 익숙한 미국이나 독일 등 선진제국에서는 이를 일찍이 받아들여 특히 업무상 배임죄로 기업인이 처벌받는 사례 중 상당한 가능성을 예방해 주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아직 이에 대한 면책적 법규정이 없고, 판례 확립도 확고하지 않다. 상사법 연구의 권위자인 최준선 성균관대 교수는 회사법 저서 최신판에서 우리 대법원도 경영판단이론을 인정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확정적으로 굳어졌다고 보기 어렵고 사항별로 처리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재벌 범죄가 대법원에 올라갈 때마다 경영판단이론의 수립에 대한 태도가 정밀하고도 확실히 굳어질지 아니면 반대로 엄격한 태도로 부결될지에 학계와 재계, 시민단체들의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CJ 관련 사안에서 경영판단이론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기엔 부담이 적지 않다. 파기자판을 택해 대법원 스스로 죄목을 특경가법 적용 대상에서 단순히 일반론인 배임(업무상 배임)으로 떨어뜨려 스스로 이 부분에 대해 형량 산정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엄벌에 처하기엔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어렵고, 그렇다고 현재 1, 2심에서 범죄 혐의 인정액을 워낙 많이 줄여준 탓에 우물거리면서 온정적 판단을 하기에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후자의 경우라면 경영판단이론에 대한 명쾌한 설명과 함께 면죄부를 줘야 그나마 논리가 서는데, 이 이론이 글로벌 스탠다드인 상황이라 해도 자기 개인회사를 살리기 위해 주주들의 피땀이 어린 돈으로 설립, 운영되는 그룹의 계열사를 동원한다는 것은 죄질이 극히 나쁘기 때문에 역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회장 방탄용으로 이 논리를 사실상 첫 공식 적용하기엔 지나치게 더러운 진창에 새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격이 된다. 재벌 옹호를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쓴다는 비판으로 인해 자칫 이 이론이 도입 초기에 사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글로벌 전반에서 도입, 사용되는 논리가 매장돼 버리는 이상한 사법 시스템을 갖춘 나라에 큰 투자를 하고, 문제 소지가 있는 계약이나 사업을 같이 할 외국계 기업들은 없다. 대법원이 이번 판결 기회에 배임의 성립은 맞으며 경영판단이론을 검토해 봤으나 그에 대한 적용은 당연히 안된다는 뜻을 밝혔다면 어땠을까. 경영판단이론의 활용에 대한 가이드라인으로 이번 처단을 '리딩 케이스'로 삼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두고 굳이 부담스러운 일을 처리하느니 파기환송심에 모든 것을 넘기고 소극적 태도에 머물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소극사법주의 그 자체라기보다는 고급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상급심으로서의 대법원 역할 모델의 짐을 비겁하게 하급법원에 떠넘긴 모양새다.

소극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재계 전체의 원망이 사법부로 향할 것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